[고전 속 정치이야기] 형세판단(形勢判斷)
천지일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초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 항량(項梁)은 진시황 사후에 조카 항우와 함께 반진기의를 일으켰다. 진승(陳勝)이 사망하자 항연은 제후들을 설읍(薛邑)으로 모아 대책을 상의했다. 이 회의에 등장한 범증(范增)의 건의에 따라 민간에서 양을 치던 초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초회왕으로 옹립했다. 회왕은 허수아비였으나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항량이 살아 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항량이 전사하자 반진군의 전선이 궤멸됐다. 팽성에 주둔하던 유방은 재빨리 항우와 연합했다. 회왕은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宋義)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해 차장(次將)으로 삼았다. 초의 병권은 회왕이 신임하는 송의에게 넘어갔다. 항우와 회왕의 사이가 벌어졌다.
회왕은 누구든지 먼저 진의 본거지인 관중을 점령하면 왕으로 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몰래 유방을 후원했다. 진의 주력과 싸우던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이 됐지만, 진의 명장 장감(章邯)과 싸우느라고 관중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그동안 유방이 관중을 점령하고 진왕을 생포했다. 간신히 장감을 격파하고 항복한 진군 20만명을 생매장한 항우가 함곡관을 공격했다. 불리하다고 판단한 유방은 장량의 건의에 따라 홍문(鴻門)으로 항우를 찾아갔다.
범증이 홍문연(鴻門宴)에서 유방을 죽이라고 건의했지만, 오만해진 항우는 유방을 살려줬다. 항우는 항복한 진왕을 죽이고, 아방궁에 불을 질렀다. 유방은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우는 인심을 잃었다. 고대 전적이 사라진 것은 진시황의 분서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항우가 아방궁을 태웠기 때문이다. 항우는 관중을 버리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부귀해진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항우에게 원숭이가 관을 쓴 꼴이라고 비판한 사람은 솥에 삶기고 말았다.
항우는 관중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회왕에게 의견을 물었다. 항우를 견제하려는 회왕은 약속대로 유방이 관중왕이 돼야 한다고 대답했다. 항우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회왕은 우리 항씨가 옹립했다. 그가 무슨 공을 세웠는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그는 제후들의 약정을 확정할 수가 없다.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군과 나 항우일 뿐이다.”
항우는 서초패왕으로 자칭하고, 회왕을 의제로 추존했다. 유방은 오지인 한중(漢中)으로 들어가 한왕이 됐다.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진의 항장 장감을 옹왕(雍王), 사마흔(司馬欣)을 새왕(塞王), 동예(董翳)를 적왕(翟王)으로 삼아 한중을 포위했다. 나름대로 대책을 세운 항우는 마침내 영포(英布)를 시켜 의제를 죽였다. 항우는 정치적 우세를 상실했다. 항우가 지지세력을 잃어가는 동안 유방은 철저히 약자동맹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동공(董公)이 유방을 찾아와 의제를 위해 상복을 입으라고 건의했다.
그렇다면 유방이 의제에 대한 군신간의 정의(情誼)가 있었던 것일까?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을 왕으로 삼자는 약정을 끌어낸 것도 의제였으며, 항우를 송의에게 붙여 북쪽으로 가게하고 유방은 서쪽을 보낸 것도 의제였다. 그러나 유방은 관중을 차지하자마자, ‘나와 제후들과의 약속’을 거론하면서 회왕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항우와 중원쟁탈전을 앞두고 갑자기 항우에게 피살된 의제를 위해 3일이나 곡을 한 것은 출병의 명분을 세우고 항우를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이다. 그는 의제의 상을 치루고 항우 토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정치적 감각을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각축전이 벌어지면 누구도 적으로 돌릴 수 없다. 과반수도 획득하지 못한 사람도 대통령이 되는 우리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민의 절반을 적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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