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부저추신(釜底抽薪)

bindol 2022. 7. 11. 05:22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부저추신(釜底抽薪)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가마솥에서 물이 끓는다. 식히려고 찬물을 붓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아궁이에서 장작을 빼내면 된다. 그것이 부저추신이다. 부저추신은 주역 제10괘인 천택리괘(天澤履卦☰☱)에서 비롯됐다. 천택리괘는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다. 건(乾☰)은 무서운 호랑이다. 태(兌☱)는 가냘프고 어린 소녀이다. 아무리 무서운 호랑이라도 나긋나긋한 소녀의 미소와 교태에는 약하다. 노자에서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즉 유약함이 강강함을 이긴다고 말한 것과 같다. 유약하면 일단 강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천택리괘의 도리이다. 또한 리괘의 상괘인 건(乾☰)은 중천에 뜬 뜨거운 태양의 형상이며, 태(兌☱)는 지나치게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한 물이 저장된 저수지이기도 하다. 천택리괘에서 유일한 음효인 육삼효는 솥에서 물이 끓을 때 아궁이에서 장작을 빼내는 형상이기도 하다.

 

특별한 놀이가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그림자밟기’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간신히 따라붙어서 힘차게 그림자를 밟으면 상대는 재빨리 몸을 굽혀서 그림자를 다른 곳으로 보낸다. 공연히 허탕이기 일쑤였다. 사람을 쫓아가지 않고 그림자만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적의 모략을 분석한다고 표면에 나타난 현상만 따라다니다가는 그림자밟기에 서툰 아이처럼 실패하기 쉽다. 바둑을 둘 때에도 상대의 의도에 말려서 손 따라 두는 사람은 대개 하수이다. 고수는 절대로 상대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생각하지 못하는 수를 내야한다. 부저추신은 지금 펄펄 끓고 있는 솥을 보며 우왕좌왕하지 말고 상대가 생각도 하지 못하는 아궁이에서 장작을 빼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장자(庄子)는 문왕(文王)이 주왕(紂王)의 강폭(剛暴)함을 밟고 일어나 형통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문왕은 유리(羑離)에 갇혔으며, 한고조 유방(劉邦)은 홍문(鴻門)에서 항우(項羽)에게 죽을 뻔 했고, 오왕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句踐)은 와신상담(臥薪嘗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유로 강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상대와 싸워 이겼다.

 

강적과 부딪쳤을 때 정면으로 싸우면 불리하다. 상대의 세력을 약화시켜 약점을 공격해야 한다. 물이 끓어서 넘치는 것은 어떤 힘 때문이다. 그 힘의 근원은 화력이다. 불은 강렬한 힘 가운데 가장 강해 누구도 쉽게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의 근원은 땔감이고 불길은 기세이다. 타오르는 불길은 함부로 대할 수 없지만, 땔감 정도는 누구나 만질 수 있다. 위료자(尉繚子) 전위(戰威)에서는 기가 실하면 싸우고, 기를 빼앗으면 도망친다고 했다. 또한 관자(管子) 치미(侈靡)에서는 진주(珠)는 불을 이길 수 있으며, 구슬(玉)은 물을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음은 양과 음 모두를 제어할 수 있지만, 양은 음이나 양을 쉽게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자연계의 원리이다. 위료자에서 지적한 투지는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해당된다. 아군에게는 투지를 고취시켜야하지만, 반대로 적에게는 투지를 약화시켜야 한다.

 

기를 빼앗으려면 마음을 공격해야 한다. 마속(馬謖)은 남만(南蠻) 원정에 나선 제갈량(諸葛亮)에게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라고 건의했다. 마속은 직접적인 군사행동보다 정치적 회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당면한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유효하다. 말장사꾼이었다가 유수에게 투항해 출세한 오한(吳漢)은 야습을 당했다. 오한은 평소처럼 잠자리에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군사들은 그러한 오한을 보고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천천히 잠자리에서 일어난 오한은 정병을 선발해 적진으로 돌격해 대승을 거뒀다. 오한은 야습한 적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이기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아군의 기세를 정비하고, 야습한 적의 기세를 약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