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쓰는 감각
입력 2022.07.27 00:22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요근래 서점가에 회고적 에세이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마이너 필링스』 『H마트에서 울다』 『사나운 애착』 등 번역서가 많았는데, 이들 작가가 자기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자발적이라기보다 비자발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봐야 할지 모른다. 보통 자서전을 쓰겠다는 결심은 국가사와 사회사에 내 삶의 지류를 삽입시켜 거대한 파고를 어떻게 헤쳐왔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회고적 에세이는 반대로 내 의도대로 써지는 것이 아니며, 결과물이 얻어내는 것은 고작 기억과의 투쟁 속에서 조금 확장된 인식의 지평 정도다.
회고는 재의미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을 겪었던 당시와, 생배추처럼 날것의 재료를 소금물에 담가 숨죽이는 작업을 하는 ‘쓰기’ 사이에 일정한 간극이 필요하다. 재료가 될 자신을 바라보려면, 쓰는 나는 재료를 객관화하고 칼로 자르며 버무릴 수 있어야 한다.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처럼 조부모와 아름다운 공간에서 함께 살았던 기억을 주재료로 삼는 글쓰기도 있지만, 록산 게이의 『헝거』처럼 글쓰기의 불가능성에 계속 부딪히면서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회고록은 일필휘지로 써지지 않기에, 말로 하는 생애구술사라도 ‘흐느낀다’ ‘침묵이 이어진다’ ‘한숨과 눈물이 반복된다’와 같은 지문이 연신 끼어들 수밖에 없다.
진부한 문장은 곧 필자의 진부함
자신을 바닥까지 드러내야 공감
그렇다면 굳이 왜 회고를 하는가. ‘현재’는 언제나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으로, 과거가 되는 순간 그것은 관조할 대상으로 바뀐다. 회고록을 쓰는 행위는, 확언컨대 반드시 해볼 만하다. 써보면 이 ‘진실’을 알게 된다. 반대로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이고 ‘세계’다. 현재는 찰나여서 늘 과거와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재의미화가 존재의 핵심 근거이기도 하다. 이는 메타인지와도 연결된다. ‘내가 어떻게 경험했는가’를 돌아보는 능력이 메타인지라 할 수 있는데, 책 읽기가 ‘돌아보는’ 틀을 제공한다면, 글쓰기는 틀을 행위로 바꿔내는 작업이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으니, 기억이 계속 변형되고 왜곡된다는 점이다. 덧칠되는 기억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가령 얀 그루에는, 기록은 안정적이며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얀은 일기를 써 ‘시적 진실’에 맞닥뜨리려 노력하면서 기록과 기억 사이를 무수히 왕복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등짐처럼 ‘자아’로 지고 살아가는 것은 기억이다. 삶은 우연의 총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기억은 우연 덩어리들의 확장과 변형을 거친다. 결국 현재의 정서 상태와 인식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기억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는데, 텍스트 속에서 기억의 가구들을 재배치하거나 내다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삶은 자신의 회고록 속에서만 온전히 의미를 되찾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인칭 서술의 거짓과 왜곡이라는 위험 속에서도 개인의 역사 쓰기는 역사학에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다만 이런 글을 쓰면서 내가 아닌 것처럼 나를 투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가령 ‘맥주 일곱 캔은 먹어야 [취해서] 이 애랑 잘 수 있다’는 외모 비하를 남학우들로부터 들은 일이나, 장애인들을 방관자의 눈으로 쳐다보면서 오히려 “식욕을 느꼈”던 부도덕한 자신도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사유의 전개는 문장 안에서 이뤄진다. 문장이 진부하다면 그건 나 자신이 진부한 것이다. 글을 쓰면서 자기교정이 이뤄지지 않고 자신의 선입관조차 아직 파악 못 했다면, 공들여 작업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생각을 좀 달리해주세요. 이런 사고관은 요즘 독자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어요.’ ‘하, 그게 바로 납니다. 내 생각도 말로 못 해요?’ 이것은 편집자와 작가 사이에서 이따금 있는 충돌이다. 나를 인식의 재배치나 혼란의 뒤엉킴 속으로 밀어 넣지 않고 고수할 생각이라면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키는 소설들은 어떻게 보면 ‘내’가 되지 못했던 수많은 타인을 ‘나’로 욱여넣음으로써 또 다른 ‘나’를 그려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다만 그 ‘나’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시간은 밤』에처럼 속물이고, 하찮아 기억 몇 가닥에 매달리는 존재일 때가 많다. 이런 투명한 밑바닥 의식에 다다를 때라야만 우리는 표면에 있는 자신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다. 자기 인식의 투명함을 얻으면 그리 기쁘지 않다는 사실을 겪어본 이들은 안다. 하지만 진부한 사고에 빠지지 않으려면 예민한 신경과민적 반응 속에서 자신을 먼저 벗겨낸 다음에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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