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7회>
“반중 정서 배후는 미국” 주장, 한국민의 지적 능력 무시하는 교만
최근 전 세계에서 반중 감정이 갈수록 거세지가 한국의 친중공 지식분자들은 그 배후가 미국이라는 음모설을 또 들고나왔다. 미국이 전 세계에 반중 정서를 유포해서 한국인도 “반중 바이러스”에 전염됐다는 식의 주장인데, 1980년대식 반미주의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대한민국은 전 세계로 활달하게 개방된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명석한 시민들이 실시간으로 세계 각국의 뉴스를 검색하며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렇게 활짝 열린 사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반중 정서를 퍼뜨렸다”고 주장한다면, 한국 국민의 지력을 무시하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독설일 뿐이다.
게다가 불과 몇 해 전까지만해도 한국의 친중공 세력은 언론매체를 장악하고 노골적인 친중주의 선전·선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을 큰돈 벌 수 있는 꿈과 희망의 나라로 미화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중국공산당 일당독재가 오히려 더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 주장하는 한 유명인의 강연 방송이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던 2017년 무렵 한국의 친중공 세력의 발호는 절정에 달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깨어 있는 시민들은 친중주의의 모순과 불합리를 꿰뚫어 보고 중국공산당의 반민주적, 반자유적, 반인류적 행태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둘째, 전 세계에 만연한 반중 정서는 중국공산당이 지난 70여 년 동안 자행해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잘못과 오류에 뿌리내리고 있다. 물론 현재 미국에는 중국공산당이 지난 70년 자행해 온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낱낱이 기록하고 연구하는 두터운 전문가 집단이 존재한다. 그 전문가 집단 중 상당수는 1950-60년대 중국에서 태어나서 문화대혁명의 광열을 직접 경험한 후 학문의 자유를 찾아 망명하거나 유학길에 올랐던 중국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미국 내에서 중국공산당을 향해 냉철한 분석과 강력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반대 여론을 억압하는 중국과 달리 미국에는 중국공산당의 통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미국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반체제 인사들도 활약하고 있다. 미국에서 반중 이데올로기가 생겨났다면 다양한 시민조직, 인권단체, 학자집단, 언론매체가 자유로운 사상의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형성된 민주적 공론일 뿐이다.
요컨대 전 세계에 확산된 반중 정서는 그 누구의 음모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중국의 현실을 점점 더 깊게 알게 된 시민들의 자발적인 각성의 결과일 뿐이다. 그 뿌리에는 바로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착오, 이념적 모순, 정치적 오류가 놓여 있다.
학문 자유 찾아 미국에 망명한 중국인들이 중국공산당 비판
중국과 달리 미국은 사상과 학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이다. 그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맞서는 중국 지식인들이 다수 미국에 정착해서 반(反)중공 투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미국에선 중국공산당의 잘못과 오류를 고발해 온 중국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공들여 쓴, 중국에서는 절대로 출판될 수 없는, 이른바 “위험한” 서적들이 다수 영역되어 매해 새롭게 출판되고 있다. 그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의 명단과 연구성과를 열거하자면, 수백 쪽의 지면이 필요할 정도다.
중국 안에 갇혀 있으면 오히려 중국의 실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열린 사회의 정보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중국공산당의 잘못과 모순을 고발해 온 중국계 지식인들은 모두가 역사적 증인이며 당대 최고의 중국통 전문가라 할 수 있다. 미국이 세계반중 정서의 진원지라면 바로 그들의 피맺힌 노력과 분투 덕분이다. 그들은 1950-60년대 중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직접 겪었던 생생한 삶의 기억을 토대로 중국공산당의 모순과 불합리를 파헤쳐서 전 세계에 중국의 실상을 알린 주역이다.
물론 중국공산당은 그들을 서구추종주의자, 제국주의 하수인, “나라이주의자”(拿來主義者, 무조건 외제만 “갖다 쓰는 주의자”), 심지어는 한간(漢奸, 한족 간신배), 내간(內奸, 내부의 간신배), 매국적(賣國賊, 매국하는 도적) 등으로 매도하고 있다. 앞으로 “슬픈 중국”은 그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과 학술적 연구성과를 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역사의 1차 사료(史料)는 바로 당대인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히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많은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수배령을 피해 도망하다가 홍콩을 거쳐 프랑스나 미국 등 서방세계로 망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민주장 운동의 상징적 인물 웨이징셩(魏京生, 1950- )처럼 장시간 무시무시한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당하다가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들끓자 중국공산당이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뒤늦게 망명을 허용한 사례도 있었다.
중국은 지금도 해외의 반체제 인사들을 검은 명단에 올려놓고 입국을 막고 있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에 투입된 20만 병력이 톈안먼 광장의 시위를 완벽하게 소탕할 때, 그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에 남아 단식투쟁 중이었던 대학생 대표단 중에서 왕단(王丹, 1969- ), 차이링(柴玲, 1966- ) 펑총더(封從德, 1966-), 우얼카이시(吾爾開希, 1968- )는 모두 이후 미국으로 갔다.
당시 부부였던 차이링과 펑총더는 프랑스 외교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망명했다. 펑총더는 15년간 프랑스에서 살면서 소르본 대학에서 중국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류하며 반중공 민주화 운동을 열정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2009년 출판된 그의 저작 <<6.4 일기: 광장 위의 공화국>>은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바로 그 당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일들을 깨알같이 적은 일지를 기초로 이뤄진 기록문학의 백미다.
하버드 대학에서 중국 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왕단은 나와 함께 중국 청대사(淸代史)의 대가 필립 큔(Philip A. Kuhn) 교수의 세미나에 참석했던 동학이었다. 그는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21명 긴급수배자 명단의 맨 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1989년 7월 2일 구속된 후 그는 2년 동안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구금 상태로 있어야 했고, 4년 형을 살고 1993년에 풀려났다. 그는 석방 직후부터 다시 중공 정부를 비판하며 민주화 활동에 나섰고, 1995년 5월 체포된 후 17개월 후에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 후로 왕단은 공개적으로 중공 정부를 비판하면서 해외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활약하고 있다. 2008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왕단은 대만의 칭화(淸華)대학에서 가르쳤는데, 2017년 6월 다시 미국 수도 워싱턴에 이주해서 중국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 상세히 소개했듯 우런화(吳仁華, 1956- )는 미국에서 30년에 걸쳐서 모두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톈안먼 대학살” 3부작을 완성해서 출간한 대표적인 망명 논객이다. 중국의 반체제 작가 정이(鄭義, 1947- ) 역시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위험” 인물이다. 그는 1980년대 내내 1968년 문화혁명 당시 10만에서 15만 명이 학살당한 광시(廣西) 대도살(大屠殺)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집단광기 속에서 피해자들의 인육(人肉)을 발라먹은 사건을 심층 취재한 이른바 “보고(報告) 문학”의 역작 <<홍색 기념비>>를 집필하고 있었다. 톈안먼 대학살 이후 그는 3년간 그 책의 원고를 들고 오지에 은신하다가 가까스로 홍콩으로 탈출해서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앞으로 “슬픈 중국”은 그의 파란만장한 역정과 저술 활동도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 밖에도 많은 중국계 학자들이 미국에 살면서 1950-70년대 마오쩌둥 치하 중국공산당이 저지른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의 실상을 파헤치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현재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계 학자 중에는 중국공산당의 편에 서서 노골적으로 친중 노선을 걷고 있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본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지식 사회는 숙명적으로 상반되는 정치적 입장과 이념 차이로 하여 갈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미국이 톈안먼 대학살 이래 중국공산당에 공민의 기본권을 짓밟히며 저항해 온 “대륙의 자유인들”에게 인간답게 살면서 자유, 민주, 인권 등 인류의 보편가치를 외치며 중국 민주화 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와 권리를 보장해 준 고마운 나라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천체물리학자 팡리즈, 덩샤오핑에 “정치범 석방” 편지...공개 서신 시위 이어져
비판적 지식인을 향한 중국공산당의 억압과 탄압에는 아량도 금도(襟度)도 없다. “슬픈 중국” 30회에서 이미 다뤘듯, 1979년 2월 중국공산당 영도자의 임기를 제한하는 규정을 제안해서 결국 덩샤오핑을 설득할 수 있었던 중국 사회과학원의 철학자 옌자치(嚴家其, 1942- )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수배당하다가 부인과 함께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옌자치 교수보다 더 극적인 미국으로의 탈출 사례는 1980년대 저명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1936-2012) 교수과 그의 부인 베이징대 물리학과 교수 리수셴(李淑嫻, 1936?- )의 서글픈 망명 혹은 추방 과정에서 볼 수 있다.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천체물리학자 팡리즈 교수는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1958년 8월부터 1987년 1월까지 28년 4개월 동안 중국과학기술원에서 근무했던 팡리즈 교수는 두 번이나 공산당원으로서 당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첫 번째 수모는 1957년 반우파 운동 때였다. 두 번째 수모는 1986년 12월 7년 1월 전국 29개 도시의 156개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을 때였다. 팡리즈는 학생들을 선동하는 반체제 인사의 낙인을 받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팡리즈 교수는 1989년 1월 6일 덩샤오핑 앞으로 공개 서신을 발송했다. 이 서신에서 그는 “건국 40주년,” “5.4운동 70주년,”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는 1989년 “자유, 평등, 박애, 인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웨이징성을 비롯한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편지가 당시 베이징을 방문 중이던 전 프린스턴 대학 교수 페리 링크(Perry Link, 1944- )를 통해서 국제 언론에 전문이 번역 게재되었다.
팡리즈 부부, 톈안먼 대학살 발발 직후 베이징 미 대사관으로 384일간 피신
이어서 1989년 2월 중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팡리즈의 뒤를 이어 중공중앙에 공개 서신을 써서 올리는 시위를 이어갔다. 팡리즈의 부인 리슈셴 교수는 베이징대가 위치한 하이뎬(海淀)구의 인민대표로 당선되면서 불과 두 달 후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나서게 될 학생 대표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4월 15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불이 붙었을 때, 중국공산당은 민주화 운동의 배후로 팡리즈를 지목했다. 톈안먼 광장 근처에도 가지 않고 두 달 넘게 자택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던 팡리즈와 리슈셴은 점점 조여오는 중공중앙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톈안먼 대학살 발발 직후인 1989년 6월 6일 신변 위협에 시달리던 두 사람은 미국 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했다. 곧바로 백악관 대변인이 두 사람의 행방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내 나라에서 외국 공관에 망명하는,” 한국인에겐 흡사 구한말 고종(高宗)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피신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례 없는 두 사람의 피신 생활은 정확히 384일 10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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