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 인민공화국’에 맞선 중 지식인 “기록이 저항이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5회>
중국 헌법 총강 제1조 “사회주의 제도 파괴하는 모든 활동 금지” 명시
10년간 중국에 체류하며 군인, 학생, 모친, 관리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심층 인터뷰로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헤친 루이자 림(Louisa Lim)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새 이름을 붙였다. 바로 “기억상실 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Amnesia)이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전 인민을 몰아서 망각의 강물 속에 빠뜨린다. 특히 1989년 봄 베이징의 민주화 운동과 6.4 대학살의 기억은 더욱 철저하게 삭제되고 있다.
중공 정부가 인민의 기억을 지우는 방법은 쉽고도 간단하다. 중국 헌법 총강 제1조에는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조직이나 개인의 모든 활동은 금지된다”고 적혀 있다. 바로 그 조항에 따라 헌법 35조에 보장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가두) 행진 및 시위” 등 공민의 자유를 제약하면 된다. 자유를 제약하는 방법도 지극히 단순하다. 중공 중앙이 과거사에 대한 유권해석을 제시한 후, 정부의 공식 발표에 어긋나는 말이나 생각을 표현한 사람들을 샅샅이 찾아내서 가둬버리면 된다.
1989년 6월 3일 밤에서 6월 4일 새벽까지 중공중앙은 20만의 군 병력을 동원해서 베이징을 점령하고 평화적 시위를 이어가던 학생과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 직후 민주화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공 중앙은 본격적인 선전전에 돌입했다.
대학살 닷새 후, 6월 9일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덩샤오핑은 계엄군의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은 진정 당과 국가를 지키는 철의 장성”이라 치켜세웠다. 그의 딸 덩룽(鄧榕, 1950- )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죽을 때까지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그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다. 덩샤오핑의 의도에 따라 중공중앙 선전부는 강력한 이념교육과 선전·선동을 이어갔다.
톈안먼 학살 모르는 중 젊은이들...탱크 사진 보고 “예술작품인가?”
1989년 6월 30일 중공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베이징 시장 천시통(陳希同, 1930-2013)은 “동란 제지와 반혁명 폭란(暴亂)의 종식에 관한 정황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9년 6월 3일 오후 다섯 시 경, 불법조직 ‘베이징시 고교(대학교 이상) 학생 자치 연합회(고자련)’과 ‘베이징 공인(노동자) 자치 연합회(공자련)’의 우두머리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과도, 비수, 쇠몽둥이, 철제 체인, 죽창 등을 나눠주며 군경을 모두 잡아서 죽여버리자고 외쳐댔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불법 조직이 선제적으로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반혁명 폭란을 일으켰기에 군대가 정당방위로 무력을 사용해서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현장을 지켰던 수많은 증인의 회고에 따르면, 천시통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었지만, 탱크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한 정권은 인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는 톈안먼 대학살에 대해서 거의 듣고 본 바가 없다. 2006년 다큐멘터리 “탱크맨(The Tankman)”을 보면, 베이징 대학 학생들에게 1989년 톈안먼의 “탱크 맨” 사진을 보여주며 아느냐고 묻자 “예술 작품이냐?”고 되묻는 장면이 나온다. 1985년 6월 5일 혼자서 맨몸으로 대규모 탱크부대를 막아선 이 청년의 영상은 이후 전 세계에서 톈안먼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중국의 젊은이들에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딴 세상의 일일 뿐이다. 14억 인구의 비대한 대륙은 “기억상실의 이상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망각에 저항하는 우런화의 기억 투쟁...방대한 역사서로 정리
“권력과 인간의 투쟁은 망각과 기억의 투쟁이다.” 체코 출신 작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의 명언이다. 32년간 망명객으로 미국에 체류해온 역사·문헌학자 우런화(吳仁華, 1956- )는 쿤데라의 이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다.
1989년 당시 그는 중국 정법대학의 젊은 교수였다. 대학살 이후 중공 당국의 수배령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우런화는 거짓과 모략에 맞서 진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30년에 걸친 그의 기록 투쟁은 급기야 201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과 64대학살에 관한 3권 방대한 역사서로 정리되었다.
200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출판된 <<톈안먼광장 유혈 철거 내막(天安門廣場血腥淸場內幕)>>은 1989년 6월 3일 오후 3시 40분부터 4일 오전 10시까지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을 분 단위로 상세하게 기록한 474쪽의 대작이다. 이어서 2009년 우런화는 <<64사건 중의 계엄부대>>를 출판했다. 이 책은 1989년 당시 베이징, 선양, 지난, 난징 등에서 차출된 20여만 병력의 실체를 부대별로 상세하게 밝힌 독보적인 저작이다. 마침내 2019년 5월 우런화는 톈안먼 대학살 30주년을 맞아 1989년 4월 15일부터 1989년 6월 30일까지 주요 사건을 날짜별로 정리한 643쪽의 <<64사건 전 과정 실록>>을 출판했다.
우런화가 그의 첫 책에서 1989년 6월 3일 저녁부터 6월 4일 아침까지의 짧은 시간에 거의 5백 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중공중앙의 교묘한 역사 왜곡과 조직적인 선전·선동을 진실의 힘으로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1989년 6월 4일 새벽 수천명 학생 깔아뭉개는 현장 목격 “영원히 잊지 않겠다” 다짐
톈안먼 시위 진압을 위해 중공 당국은 해군을 제외한 전군의 각종 부대를 출동시켰다. 그중엔 장갑병, 탱크병, 육군, 공군, 포병부대도 속해 있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6시경, 계엄부대 수만 명 병력이 톈안먼 광장을 전면 통제했다. 광장의 모든 진입로는 봉쇄되었다. 탱크와 장갑차가 도열하고, 중무장한 계엄군이 광장을 점령했다. 계엄군은 단식투쟁을 이어가던 톈안먼의 시위대를 향해 최후통첩을 선포했다. 그들의 임무는 6월 4일 아침까지 시위대를 모두 내쫓고 광장을 완벽하게 비우는 것이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즉시 광장에서 떠나지 않으면 즉각 무차별 발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시위대의 다수가 결사 항전을 외쳤으나 지난밤 11시 무렵부터 들려오는 총성은 갈수록 더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학생들은 해산을 결정했고, 광장 한 모퉁이로 열을 맞춰 모두 빠져나갔다. 7주 동안 이어진 톈안먼 광장의 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군대의 총칼 앞에서 서글프게 막을 내렸다.
학생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을 빠져나온 우런화는 북서쪽으로 10.5킬로 떨어진 중국 정법(政法)대학의 숙소로 향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6시경 톈안먼 광장에서 서쪽으로 불과 1.5킬로 떨어진 류부커우(六部口)를 지날 때였다. 3대의 탱크가 황색 매연을 뿜는 독기탄(毒氣彈)을 쏘면서 달려와선 인도 위에서 줄 맞춰 걷고 있는 수천 명 학생의 대오를 들이받아 깔아뭉개고 갔다. 우런화는 수많은 학생 틈에서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는 눈물을 쏟으며 공포에 질린 학생들과 함께 정법대학의 캠퍼스로 돌아갔다. 그날 아침 10시경 톈안먼 광장에서 마지막까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학생과 교수들이 중국정법대학의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 전날 밤 계속되는 날카로운 총성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수천 명의 정법대 교수와 학생들은 가슴을 졸이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캠퍼스 동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런화는 캠퍼스 중앙 건물 앞 의자 위에 눕혀진 다섯 구의 시신을 보았다. 바로 그날 아침 탱크에 깔려서 급사한 다섯 명의 학생들이었다. 일순간 캠퍼스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우런화는 그 참혹한 현장에서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서 목 놓아 통곡했다. 그의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한 마디를 읊조렸다. “영불유망(永不遺忘, 영원히 잊지 않으리)!”
4시간 바다 헤엄쳐 마카오로 탈출, 홍콩 거쳐 미국 망명...30년간 이어진 기록 투쟁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우런화도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1989년 6월 5일 그는 고향 저장성 원저우(溫州) 지역에 숨어든 후 좁혀오는 공안의 수사망을 피해서 도망을 다녀야만 했다. 반년의 도주 생활 끝에 그는 1990년 2월 광둥성 남단의 주하이(珠海)에 당도했다. 주하이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는 4시간 헤엄을 쳐서 마카오로 탈출했고, 곧 홍콩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당시 홍콩의 인권단체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가들을 홍콩으로 탈출시키는 “황작(黃雀, 누런 참새)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대학살 발생 직전인 1989년 6월 3일 점심께 우런화는 베이징 대학에서 열린 “애국 호헌 연석 회의”에 참가했다. 각계 민주화 활동가들이 모이는 비밀회의였는데, 그때 그곳에서 홍콩 침례교 대학 사회학과의 츄옌량(邱延亮)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타이완 출신의 노동운동가인 츄 교수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들을 국외로 피신시키기 위해 그들의 신상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인연으로 우런화는 “황작 작전”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홍콩으로 망명한 후 우런화는 곧바로 스스로 직접 겪었던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생생한 경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1990년 7월 우런화는 다시금 “황작 작전”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우런화는 해외로 망명한 톈안먼 민주화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민주중국진선(陣線. The Federation for a Democratic China)”에 가입해 맹활약하면서도 기록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30년에 걸친 그의 기록 투쟁은 2019년 3부작의 방대한 역사서로 정리되었다.
톈안먼 대학살에 대해 아예 말도 꺼낼 수 없게 하는 중국공산당의 부당한 폭력 앞에서 집체적인 망각에 맞서는 한 지식인의 무서운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막강한 중국공산당의 권력 앞에서 미국에 체류하는 일개 망명가의 기록이 미약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역사는 동시대인의 생생한 기록이 모여서 흘러가는 도도한 강물과도 같다. 막강한 중국공산당이지만, 우런화의 진실한 기록을 이길 수는 없다. 중국공산당의 인권 유린과 정치범죄를 직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런화의 기록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33년 지난 일에 언론 보도 금지하고 학술토론조차 감시 처벌하는 이유
마오쩌둥 사후 1년밖에 되지 않은 1977년 9월 덩샤오핑은 문혁 시기 발생한 3백만 건 이상 억울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발란반정(撥亂反正)” 운동을 개시했다. 반면 33년 전에 벌어진 톈안먼 대학살에 관해서 중공중앙은 오늘도 탄압과 검열의 고삐를 조이고 있다. 왜 중공중앙은 과거사의 오류를 인정하고 유가족의 슬픔을 달래주는 정치적 출구조차 찾을 수 없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듯하다.
첫째, 중공중앙은 문혁 시기의 착오를 비판함으로써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는 이념적 전환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톈안먼 대학살의 과오를 시인하는 순간, 중공중앙은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언제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중공중앙이 톈안먼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고 왜곡해왔기 때문이다. 영국의 비밀 외교문서에 적혀 있듯 만일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1만 명”에 달한다면, 중공중앙은 절대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힐 수가 없다.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 중공중앙은 그 자체로 통치의 정당성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중공중앙은 과연 왜 이미 33년이나 지나버린 과거사에 대해서 언론 보도는 고사하고 학술 토론조차 할 수 없게 갈수록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고 있을까?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 세계 반중 정서 진원지는 중국공산당 (0) | 2022.08.22 |
---|---|
‘개혁개방’ 덩샤오핑이 톈안먼 대학살 감행한 이유는? (0) | 2022.06.19 |
톈안먼 33주기 애도의 물결... “젊은이를 어찌 다 죽일 수 있으랴” (0) | 2022.06.18 |
다가오는 톈안먼 33주기...인민해방군이 짓밟은 자유화 운동 (0) | 2022.06.18 |
이념에 빠져 과학 거부하면서 독재자 숭배하는 좌편향 오류 (0) | 2022.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