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덩샤오핑이 톈안먼 대학살 감행한 이유는?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6회>
대한민국 친중 세력의 편견과 아집, 모순과 불합리 담긴 ‘짱개주의’
지난 6월 9일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짱개주의’를 내세웠다”고 주장하는 친중공 성향의 책을 한 권 추천하면서 “언론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라는 트윗을 날렸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언론에 “슬픈 중국”의 실상을 기록해 온 1인으로서 전직 대통령의 그 발언을 묵과할 수 없다. 그 짧은 글귀 속에 대한민국 친중공 세력의 편견과 아집, 모순과 불합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중국 밖의 지식인이 중국공산당 정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비판하면, 중국 안팎의 친중주의자들은 으레 “서구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의 현학적 상투어를 들이대며 중국공산당을 옹호한다. 특히 구미의 지식인이 중공 정부를 비판할 때, 이들은 “인종주의”의 프레임을 씌우고 반발한다. 중국 내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의 실상을 비판하는데, 비판자의 피부색이 왜 문제가 되는가? 오히려 정당한 비판에 반발하는 자들이야말로 “중화 중심주의,” “중국 특수주의,” “중국 예외주의,” “아시아 우선주의,” “황색 인종주의” 등 낡고 뒤틀린 20세기적 편견에 빠져 있지 않은가?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등은 서구만의 가치가 아니라 유엔 헌장에 명기된 인류의 보편가치이다. 세계 196개 유엔 회원국은 유엔 헌장에 따라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하물며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인 중화인민공화국임에랴! 중국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의 실태를 고발하는데, “제국주의적 내정 간섭”이라는 중공의 반발은 궁색하기만 하다. 14억 중국 인민은 “보편가치”에서 벗어난 예외적 인류라는 말인가? 근대 서구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설파한 공자(孔子)의 휴머니즘에 따라도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는 용납될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인들도 인권, 자유, 민주, 법치를 갈망하고 있다. 다만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국의 인민은 민주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억누를 수밖에 없을 뿐이다. 탱크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20만 병력을 투입해서 수도를 통째로 점령하는 광폭한 권력 앞에서 비무장의 시민들이 저항을 이어갈 수는 없는 까닭이다. 1970-80년대 한국과 대만 등의 권위주의 독재 하에선 민주화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지만, 북한이나 중국 같은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화 운동의 불길조차 일어날 수가 없다. 특히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민주의 싹을 자르고 불사르는 전체주의적 인권유린이었다. 중공중앙은 대체 왜 그토록 잔악무도한 대학살을 감행해야만 했는가?
탱크 장갑차 무장 20만 병력 투입...보수파로 기운 덩샤오핑, 개혁파 제압 노려
1989년 “베이징의 봄”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민주, 자유, 부패 척결을 외치며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과 시민을 향해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20만 병력을 투입했다. 그 20만 병력은 국가의 수도를 에워싸고 들어와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다가 일격에 도심을 탈취하는 군사작전으로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학살하고 진압했다. 진정 중공중앙이 대학살을 감행할 때 시위를 해산하고 인민을 겁줘서 굴복시키려는 일차원적 의도밖에 없었을까? 그 목적이 다였다면 인명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는 전술이 없었을 리 없다. 비근한 예로 1976년 4월 톈안먼의 시위를 진압할 때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13년 전 이미 군 동원 없이 톈안먼 광장의 시위를 큰 무리 없이 진압했던 중공중앙이 1989년 6월에는 20만 병력을 동원하는 실로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49년 1월 국공내전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군대가 베이징을 “해방”한 후, 그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수도를 점령한 사례는 없었다. 덩샤오핑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20만 병력의 출동을 명했는가?
우선 그 당시 동원된 군병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래 표와 같이 베이징 주위 경기(京畿) 지역 방위 부대 외에도 랴오닝성의 선양(瀋陽), 상둥성의 지난(濟南), 심지어는 베이징에서 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난징(南京)에서도 대규모의 군부대가 동원되었다.
지역 군구(軍區) | 소속 부대 |
베이징 | 육군 제24집단군, 제27집단군, 제28집단군, 제38집단군, 제63집단군, 제65집단군 |
선양(瀋陽, 랴오닝성) | 육군 제39집단군, 제40집단군, 제64집단군 |
지난(濟南, 산둥성) | 육군 제20집단군, 제26집단군, 제54집단군, 제67집단군 |
난징(南京) | 육군 제12집단군 |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 낙하산병 제15군 |
베이징 | 포병(砲兵) 제14사(師) |
베이징 위술구(衛戍區) | 경위(警衛) 제1사, 경위 제3사 |
톈진(天津) 경비구(警備區) | 탱크 제1사, 무장 경찰 부대 |
베이징시 | 총대(總隊) |
도합 병력 총수 | 20만 이상 |
<吳仁華, [[六四事件中的戒嚴部隊]] (眞相出版社, 2009), 8쪽 > |
지난주 소개했던 “톈안먼 대학살”의 연구자 우런화(吳仁華, 1952- )는 톈안면 대학살의 최종결정자인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과 중공중앙의 보수파에겐 두 가지의 더 큰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덩샤오핑과 양상쿤(楊尙昆, 1907-1998)이 이처럼 방대한 병력을 동원해서 이처럼 주도면밀한 군사작전을 진행한 것은 분명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들과 학생들을 성원하는 시민들을 진압하는 목적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은 중공 당내에서 정변(政變)을 막고, 군대의 병변(兵變)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吳仁華, <<六四事件中的戒嚴部隊>>, 27쪽)
덩샤오핑과 양상쿤의 입장에서 당내에서 “정변”을 획책할 수 있는 요주의(要注意)의 인물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과 중공중앙 정치국 상위의 후치리(胡啓立, 1929- ), 중앙서기처 서기 루이싱원(芮杏文, 1927- ), 통전부(統戰部) 부장 옌밍푸(閻明複, 1931- ) 등이었다. “정변”이란 권력투쟁을 통해 정부의 권력이 교체되는 상황을 이른다. 만약 1989년 상황에서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정권의 구심을 탈환하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79년부터 개혁개방 초기부터 덩샤오핑은 흡사 두 날개의 새처럼 좌우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는 “보수파”와 시장주의 자유화를 지향하는 “개혁파”를 끌어안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보수파에 기운 덩샤오핑은 이미 1987년 1월 15일 개혁파의 영수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파면했다. 후야오방에 이은 개혁파 영수 자오쯔양 역시 6.4 대학살 이후 가택 연금을 당해야만 했다.
덩샤오핑으로선 군대의 동원이야말로 일거에 개혁파를 제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덩샤오핑은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의 직책을 모두 밑 사람에 양보한 채로 오직 중앙군사위 주석의 직위만을 견지하고 있었다. 본래 어떤 국가든 군권을 장악하고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군대의 최상위 통수권자이지만, 동시에 의회가 군사 명령계통을 결정하고 군사 조직을 창설하거나 개편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해서 군의 정치적 개입은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근대 입헌주의의 군사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달리 중국은 정부 내 권력분립을 이념적으로 부정하기에 270만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에 귀속된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최고 영도자가 정변의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20만 병력을 통원해 수도를 통째로 점령하는 대규모 무력 시위를 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민주적 절차의 국민 총선거가 아니라 내전을 통해 군사작전으로 건설된 나라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중국에서조차 군권의 장악은 절대로 쉬운 일일 수 없다. 당내 권력의 역학관계에 따라서 군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 자체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마오의 兵法 활용...“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쿠데타를 막아라”
덩샤오핑은 분명 마오쩌둥의 선례를 통해서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험했던 듯하다. 73세의 고령으로 전 중국으로 문혁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고 정적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던 마오쩌둥의 정치권력도 실은 그의 군사 대권에서 나왔음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덩샤오핑이 몰랐을 리 없다.
문화혁명 관련 야사(野史)에 따르면, 문혁의 공식적 개시를 3개월 앞둔 1966년 2월 마오쩌둥은 이미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여서 베이징을 통째로 포위하는 친위(親衛)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마오쩌둥의 “2월 병변(兵變)”이다. 1965년 11월 베이징을 떠나 남방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현실적으로 남방의 병력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국방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와의 긴밀한 조율 아래 랴오닝성 선양(瀋陽) 군구의 정예부대 제38군을 베이징으로 진격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선양 제38군은 본래 1950년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병력으로 전 중국 육군 유일의 기계화 부대였다. 마오쩌둥은 1644년 만주족이 진입했던 바로 그 산해관(山海關)으로 선양 제38군을 진입시켜서 베이징을 포위하는 작전을 짰다. 소련의 침략에 대비하라며 베이징의 수도방위부대를 산시(山西)와 네이멍구(內蒙古)의 중·소와 중·몽의 국경지대로 “천릿길 야영” 훈련을 보낸 후, 마오쩌둥이 베이징의 빈틈을 위협하는 무력 시위를 벌였다는 이야기다. 이 가설의 진위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군에 대한 막강한 장악력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은 결코 문혁을 일으키고 이끄는 정치권력을 발휘할 수 없었음엔 틀림없다.
마오쩌둥의 권력 기반을 꿰뚫고 있었던 덩샤오핑은 1989년 상황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이야말로 군부의 병변(兵變), 곧 쿠데타를 막기 위한 최선의 묘수라 여겼을 수 있다. 덩샤오핑으로선 군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선 군사 훈련을 넘어 실제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1989년 5월 말부터 톈안먼 진압의 명령을 받은 군부 장성들이 중공중앙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9년 5월 말 군부 일각의 항명... 군 투입 반대 연명 성명서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 문혁 당시 최초로 군부의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지목됐던 비운의 장성이었다. 홍위병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투신한 후 불구가 되었음에도 그는 들것에 실려 다니면서 계속 조리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그의 딸 뤄뎬뎬(羅點點, 1951- , 본명 峪帄)은 1989년 당시 해군 병원 문진과의 주임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중공중앙이 군대를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뤄뎬톈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뤄뎬뎬은 아버지 뤄루이칭의 군맥(軍脈)을 총동원하여 군부의 중요한 인물들을 곧바로 접촉했다. 1989년 5월 22일 단 하루 만에 그는 1955년 장군 직위를 수여 받았던 해방군 상장(上將, 중장과 대장 사이 계급) 중에서 7명의 서명을 받아 냈고, 곧이어 계엄 지휘부에 톈안먼 광장에의 군대 투입을 반대하는 연명(聯名) 성명서를 작성해 올렸다. 물론 해방군 원로 상장 7인의 연명 성명서 관련 뉴스는 중국 관영 매체에선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다만 무력 진압을 주장해 온 덩샤오핑 등 중공중앙의 강경파는 군부의 반대 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뤄뎬뎬은 그 후 긴급 체포되어 1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한 후에야 덩샤오핑의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지만, 군직은 박탈당했다.)
군부 원로의 반발에 부딪혀 무력 진압을 포기한다면, 중공중앙의 군권 장악력은 급속히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더욱 강경한 무력 진압을 결정한다. 1983-1988년 덩샤오핑의 아래서 국가주석직을 맡았던 리셴녠(李先念, 1909-1992)의 조카딸 류야저우(劉亞洲, 1952- )는 공군(空軍)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내부 보고서에서 당시 베이징 군구 병력은 지역 사정에 영통(靈通)한데다 학생들과 연계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톈안먼 무력 진압에 적합하지 않다며 다른 지역의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계엄군의 구성이 베이징 부대뿐만 아니라 선양, 지난, 난징의 부대까지 혼합된 다지역의 복합 부대로 구성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병사와 시민 사이의 유대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1989년 5월 말 계엄군을 1차 투입했을 때, 학생과 시민들은 군사 차량을 몸으로 막으면서 굶주린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절대로 시민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 설득했다. 이에 진입이 막혀버린 계엄군은 즉각 군부대를 철수해야 하는 긴급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러한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1989년 6월 초 계엄군을 새로 정비한 후 중공중앙은 새로운 기동 전술을 펼쳐서 톈안먼 대학살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상세한 내용은 차후 당시 계엄군 병사의 진술을 근거로 서술할 예정이다.)
대학살 참상 알고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 시대착오적 친중공 사대주의
톈안먼 대학살을 감행함으로써 덩샤오핑은 당내의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군부의 저항 집단을 선제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으로선 일거양득의 권력 게임이었지만,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비참하게 사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에 대한 비판은 자유와 민주를 중시하는 세계시민의 당연한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짱개주의”를 내세운 게 아니라 낡고 부패한 좌파 기득권 세력이 권력 유지를 위해 시대착오적 “친중공 사대주의”를 내세웠다. 중국 현대사의 참상을 직시한다면 그 누구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하는 비례(非禮)의 우(愚)를 범할 순 없다.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식 외교 석상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그 나라의 지식정보 체계가 마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진정 대통령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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