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부러진 칼집에 적힌 이름… 무덤 주인 누군지 알아냈죠

bindol 2022. 10. 2. 19:03

 

[뉴스 속의 한국사] 부러진 칼집에 적힌 이름… 무덤 주인 누군지 알아냈죠

입력 : 2022.08.25 03:30

    금관총

 ①금관총과 그 주변 신라 고분의 모습으로, 원이 그려진 부분이 금관총의 위치예요. 금관총은 1921년 봉토의 대부분이 사라져 높이 20m가 넘는 봉황대·황남대총 등 대형 고분 사이 작은 섬처럼 남아 있어요. ②금관총은 신라 고분 중 유일하게‘이사지왕’이라는 무덤 주인의 이름이 밝혀진 곳이에요. 큰칼 3자루에 새겨진 문구로 밝혀냈죠. ③위쪽 사진은 칼집 끝에 음각으로 새겨진‘이사지왕’(尔斯智王) 문구. 아래쪽 사진은 2015년 재발굴 때 찾아낸‘이사지왕도’(이사지왕의 칼) 문구가 적힌 칼집 끝장식이에요. ④금관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시는 신라 고분 '금관총'을 현대적인 전시 공간으로 정비해 지난 16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어요. 이에 맞춰 국립경주박물관에서도 금관총에서 출토된 '이사지왕(尔斯智王)' 문구 등이 새겨진 세 자루 칼을 상설 전시실에 전시한다고 하는데요. 101년 전 발견된 금관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금관이 발견된 곳이자 신라 고분 중 유일하게 이사지왕이라는 무덤 주인 이름이 밝혀진 곳이에요. 이 무덤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어떤 중요한 발견이 있었는지 알아볼게요.

우연한 발견과 허술한 조사

일제는 한반도를 강제 병합하기 전인 1906년부터 경주 지역 신라 고분을 여러 차례 발굴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어요. 경주 지역 신라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 또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불리는 특수한 구조 때문에 대규모로 발굴하지 않으면 부장품이 보관돼 있는 무덤 중심부까지 진입할 수 없어요. 5~6세기 경주 지역에서 유행하던 돌무지덧널무덤은 시신을 안치하는 나무널[木棺]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 나무곽[木槨]에 각종 부장품을 묻었어요. 그리고 그 주변과 상부에 돌 더미를 쌓았어요. 가장 바깥쪽에 흙을 덮었고요. 이런 복잡한 구조 때문에 일본인들은 여러 차례 신라 고분 발굴을 시도했지만 유물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한 거예요.

금관총은 우연한 기회에 발견됐어요. 1921년 9월 24일 경주 노서리 부근을 순찰하고 있던 경주경찰서 순사는 3~4명 어린아이가 파란색 유리구슬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어요. 이것이 혹시 고분에서 나온 옥(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구슬이 나온 곳을 추적해보니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인 봉황대 아래의 박모씨 집 주변이었어요. 순사가 박씨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조선인 인부 몇 사람이 도로 공사를 위해 계속 주변의 흙을 파내고 있었고요.

그런데 그 주변으로는 각종 청동기와 금제품·유리옥 등이 흩어져 있었어요. 이에 순사는 이곳이 왕릉이나 귀족 무덤이 아닐까 싶어 흙 파기를 중지시키고 이 상황을 상부에 보고했어요. 1921년 봉황대 주변은 경주역으로 통하는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길가에 조선인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던 곳이에요. 그런 민가 중에 박씨 집 뒷마당이 유물이 묻혀 있는 장소에 근접해 있었는데, 당시 어느 누구도 박씨 집 주변 커다란 모래 언덕처럼 생긴 곳이 신라 고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예요.

당시 경주경찰서장은 조선총독부 허락이나 전문가 입회 없이 곧바로 금관 등 유물을 수습했어요. 그렇게 경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금관은 전문가가 아닌 지역 향토사학자들 손으로 수습됐고, 그로 인해 금관이 출토된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답니다.

이곳에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이후 조선총독부에 보고됐어요. 조선총독부에서는 고고학 전문가를 경주로 급파했지만 그때는 이미 유물 수습이 끝난 뒤였어요. 금관총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경주경찰서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유물 관리 역시 매우 허술했던 것 같아요.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이 확실한 금제 장신구와 굽은 옥 등 8점은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요. 이 유물이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유출됐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총독부박물관 담당자가 경주에 도착하기 전 경주경찰서에서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시기에 유출됐을 가능성이 높아요.

대도(大刀)의 발견과 고분의 재발굴

금관총이 발견된 뒤 1924과 1925년 또다른 무덤인 금령총과 서봉총에서 두 점의 금관이 추가로 발견되고, 식리총에서도 화려한 금동신발이 발굴되면서 '황금의 나라' 신라와 신라 고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됐어요. 1970년대에는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발굴되면서 신라 고분 연구가 심화했는데요. 당시 국내 대다수 연구자는 금관총을 475년부터 500년 사이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하면서 자비왕(재위 458~479년)이나 소지왕(재위 479~500) 또는 지증왕(재위 500~514년)의 무덤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가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칼의 청동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칼집 끝에 음각으로 이사지왕(尔斯智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1921년 금관총 발굴에서는 모두 세 자루의 큰칼이 출토되었는데요. 그 중 두 점의 큰칼과 칼집에서 이사지왕 문구를 비롯해 尔(이)나 八(팔), 十(십) 등이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서 음각돼 있었죠.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이사지왕이라는 명문만으로 무덤 주인공을 이사지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어요. 고분 출토 유물에는 망자가 소유하고 있던 유물뿐 아니라 망자를 추모하기 위해 부장된 다른 사람의 유물도 함께 남아 있을 수 있거든요.

이에 재발굴에 대한 필요성이 커졌고, 2015년 금관총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됐어요. 그 결과 금관총의 봉토나 적석부(무덤에 쌓아 둔 돌 더미 부분) 등의 크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됐어요. 특히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조하는 과정을 세부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이사지왕도(尔斯智王刀)'라는 문구가 적힌 새로운 칼집 끝장식을 발견했는데요. 1921년 일본인들이 금관총 유물을 수집하면서 세 자루 중 한 자루의 부러진 칼집 끝장식을 수습하지 않고 빠뜨린 거였어요. 당시의 조사가 얼마나 졸속으로 진행됐는지를 잘 보여주지요.

이 문구는 '이사지왕의 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이 명문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금관총에서 발견된 큰 칼의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는 것이 분명해졌고, 금관총의 주인 역시 이사지왕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답니다.


[금관총의 주인, 이사지왕은 누구]

이사지왕은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현재까지 확인된 신라 금석문에는 동일한 이름이 나오지 않아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다만 금관총이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토대로 그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자비왕이나 소지왕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하기도 해요. 그러나 역사 기록에 나오지 않는 왕족이나 6부(건국 주체가 된 6개의 정치 단위체)의 우두머리로 추정하기도 하지요. 503년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는 일곱 명 왕을 뜻하는 '칠왕(七王)'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는데요. 이를 통해 당시 신라에 '왕'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거예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