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크고 화려하게 장식한 기와… 182㎝짜리도 발견됐어요

bindol 2022. 10. 2. 19:07

 

[뉴스 속의 한국사] 크고 화려하게 장식한 기와… 182㎝짜리도 발견됐어요

입력 : 2022.09.08 03:30

   

전통건축 속 '치미'

 ①10월 30일까지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국의 치미’(Once Upon a Roof) 전시실에 놓인 치미. 한국 고대 건축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기술을 외국인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②경주에서 발견된 무늬 벽돌로, 누각처럼 생긴 목조건물의 지붕 양 끝에 치미를 얹어요. ③부여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치미. 44m 떨어진 두 지점에서 발견된 것을 합쳤더니 원래의 완전한 형태로 복원됐어요. ④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치미. /국립중앙박물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전통 건축 문화를 소개하는 '한국의 치미(Once Upon a Roof: Vanished Korean Architecture)' 특별전이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어요. 치미(鴟尾)란 전각 등의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인데요. 국립중앙박물관과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이 함께 기획해 10월 3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백제와 신라, 고려의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치미 등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치미를 사용했는지 기와 건물의 역사와 함께 알아볼게요.

기와 사용과 기와집의 등장

우리나라는 목조 건물이 많아요. 건물의 주요 구조재를 나무로 만든 거지요. 목조 건물의 지붕에는 보통 기와를 올려요. 기와는 목조 건물의 지붕에 사용하는 건축 부재의 하나로, 빗물이 스며들어 나무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해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암키와(지붕의 고랑이 되도록 젖혀 놓는 기와) 1장의 평균 무게는 3㎏ 내외예요. 기와집 한 채를 만드는 데 최소 1만장 이상의 기와가 사용됐어요. 기와집 한 동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최소 30t 이상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튼튼한 기둥이 필요한 거예요. 삼국시대 기와집은 건축과 토목 기술, 기와 제작 기술이 결합돼 만들어진 보기 드문 건축물이었답니다.

삼국시대 기와 건물은 3세기 무렵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늦어도 4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에서 규모가 작은 기와집이 만들어졌어요. 7세기 고구려의 모습을 전하는 중국의 역사책에는 고구려 사람에 대해 "반드시 산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모두 이엉(짚 따위로 엮은 것)을 엮어 지붕을 덮고, 오직 불사(佛寺·절)와 신묘(神廟·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 왕궁과 관부(官府·정부 등을 이르는 말)만이 기와를 사용한다"고 적혀 있어요. 대부분의 고구려 사람들은 초가집에서 살았고 기와집은 왕궁과 관청, 제사 시설, 불교 사찰 등 중요 시설에서만 사용했다는 거지요.

치미의 기원과 등장 시기

치미는 한자어로 '솔개 꼬리'라는 뜻이지만, 그 기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려요. 중국 후한(25~220년) 때 유행하던 봉황의 날개를 형상화했다는 견해와 물고기 지느러미를 보고 만들어졌다는 견해, 고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물고기 괴물 '마카라(Makara)'에서 기원했다는 견해도 있어요. 목조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기 때문에 화재가 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물에 사는 물고기 지느러미 형태로 치미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크고 둔중한 기와집에 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치미를 올려 시각적 무게감을 줄였을 수도 있어요.

기와집에 사용하는 많은 장식 기와 중 치미는 가장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고 크기도 커요. 그래서 다른 기와보다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도 늦었어요. 중국에서는 후한 때부터 치미를 사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치미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91년 "까치가 태극전(太極殿) 동쪽의 치미에 둥지를 틀었다"는 내용이에요. 태극전은 조선 시대 경복궁 근정전처럼 왕궁의 가장 중요한 의례용 건물이지요. 그 밖에도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의 치미가 지진으로 땅에 떨어졌다거나, 치미에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는 기록도 함께 보이는데요. 이는 치미가 다른 장식 기와에 비해 크기가 커서 작은 진동에도 떨어지기 쉽고, 지붕 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큰 새들이 보금자리를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안악 3호분과 안악 1호분 등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 기와 지붕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치미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자료예요. 안악 3호분은 357년에, 안악 1호분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만들어진 무덤이므로 적어도 4세기 후반부터는 고구려에서 치미가 제작돼 유행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요.

화려하고 기품 넘치는 고대의 치미

고구려 때 만든 치미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치미는 백제의 절터에서 출토된 것들이에요. 고대의 치미는 높이 1m, 폭 60㎝ 내외로 크기가 커서 여러 개의 파편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부여 왕흥사지나 부소산사지, 익산 미륵사지에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의 치미가 발견됐어요. 그중 부여 왕흥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치미는 위아래를 두 개로 나눠서 제작했어요. 두껍고 큰 점토 덩어리를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굽게 되면 균열이나 뒤틀림, 터짐 현상이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일부러 나누어 제작한 거래요.

왕흥사지와 부소산사지에서 출토된 치미의 뒷면에는 연꽃무늬수막새가 장식돼 있어요. 미륵사지 치미의 날개 끝부분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여기에 뾰족한 막대기나 쇠붙이를 꽂아 새가 앉거나 둥지를 틀지 못하게 했지요.

신라에서는 월성 등 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해 황룡사지와 분황사지, 사천왕사지 등 절터에서 완전한 모양의 치미가 발견됐어요. 황룡사지에서는 높이 182㎝, 폭 132㎝나 되는 대형 치미가 발견됐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의 치미 중 가장 커요.

두 개로 나뉜 치미의 상하 경계면에는 위아래 각각 8군데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요. 서로 분리된 몸체를 철사나 노끈으로 결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돼요. 분황사지나 사천왕사지 등 통일신라시대 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들은 이전 시기 치미와 형태상 별다른 차이가 없어요. 다만 크기가 작아지면서 비슷한 크기로 규격화되고 연꽃무늬뿐 아니라 넝쿨무늬나 구슬무늬를 새겨 훨씬 더 화려해지는 특징을 보인답니다.


[우연히 복원된 왕흥사지 치미]

부여 왕흥사지는 부소산성과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예요. 목탑지에서 577년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겨진 사리 용기가 발견돼 더 유명하죠. 왕흥사지의 동쪽 회랑지 북쪽에 있는 작은 건물터에서는 44m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진 남쪽과 북쪽 기단에서 100여 개로 깨진 치미 조각들이 발견됐는데요. 북쪽에서는 94조각, 남쪽에서는 39조각이 발견됐어요. 그것을 하나하나 맞추어보니 남쪽에서는 치미의 윗부분이, 북쪽에서는 치미의 아랫부분이 복원됐어요. 두 개를 서로 합쳐보니 놀랍게도 높이 123㎝, 폭 74㎝ 크기의 완전한 치미가 됐어요. 이 치미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데요. 왕흥사가 강가에 자리하며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했다는 역사 기록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