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일제 추적 피해 8년간 중국 8개 지역 옮겨다녔죠

bindol 2022. 10. 2. 19:05

 

[뉴스 속의 한국사] 일제 추적 피해 8년간 중국 8개 지역 옮겨다녔죠

입력 : 2022.09.01 03:30

    

임시정부의 대륙 대장정

 ①1945년 11월 3일 고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마지막 청사였던 중국 충칭 연화지 청사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이에요. ②중국 항저우 호변촌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국사편찬위원회·조선일보DB
 
 
'임정(臨政·임시정부)의 아들'이라 불렸던 김자동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최근 별세했어요. 김 회장은 아버지가 독립운동가 김의한 선생이고 어머니는 '임정의 안주인'으로 불린 정정화 선생인데, 어린 시절 상하이(上海)에서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충칭(重慶)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단한 행로를 함께했다고 해요.

무려 3000㎞에 가까운 거리를 이동한 대장정(멀고 먼 길을 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이 여덟 지역은 모두 우리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고, 마지막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은 중국의 옛 삼국시대 촉(蜀)나라 땅인 깊은 내륙이에요. 임정은 왜 거기까지 갔던 걸까요? 바로 일본의 침략을 피해 이동하면서 끝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출발한 민주공화정 대한민국

1919년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외친 3·1운동을 알죠? 그 운동은 단순히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나타낸 데서 그친 것이 아니었어요. 나라를 광복시키되 옛 조선의 왕정(임금이 다스리는 정치)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정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대한제국'으로 망했으니 '대한'이란 이름으로 다시 흥해야 하겠지만,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라 국민의 나라인 '민국'으로 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남짓 지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됐습니다. 헌법인 임시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였고, 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는 거였어요.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국내외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했죠.

상하이 시절의 임시정부는 해외에 있는 동포 사회와 교류하며 외교 활동과 비밀 조직 운영에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념 대립과 노선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고, 1920년대 후반에는 활동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김구의 주도로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며 다시 활로를 찾게 됐지요. 당시 일본군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한 뒤 개최한 일왕 생일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윤봉길 의거입니다.

대륙 관통한 고난의 길

윤봉길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사건인 동시에 임정이 '고난의 길'로 접어드는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1932년 5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임시정부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밀정을 따돌리기 위해 한 시골 도시의 호수에 뜬 배 위에서 국무회의를 연 일도 있었답니다. 임정은 1935년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 근처의 전장으로 이동했고, 김구는 중국 주석 장제스(蔣介石)와 난징에서 만나 지원 약속을 받았습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의 태도가 바뀌었던 것이죠.

그러나 다시 서둘러 임정 본부를 옮겨야 할 큰일이 터졌습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군의 거센 공격에 중국은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야 했어요. 임시정부는 배를 마련해 양쯔강을 따라 서남쪽인 후난성의 창사로 갔는데요. 곡물 가격이 싸고 홍콩을 통해 국제 사정을 접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임정은 1938년 5월 '남목청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독립운동 정당 통합을 논의하던 중 불만을 품은 당원이 권총을 쏴 독립운동가 현익철이 숨지고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부상을 당한 비극적인 일이었죠.

이해 7월 임시정부는 세계 정세의 변화를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중국 남쪽 광둥성의 광저우로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막 자리를 잡자마자 일본군이 광둥성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이곳에서 탈출해야 했습니다. 100명 넘는 사람들이 버스와 배를 타고 북서쪽 류저우로 갔죠. 여기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결성돼 중국인의 항전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1939년 4월엔 충칭 근처 치장에 도착해 정치적 통합과 군대 결성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동녕이 서거했습니다.

마지막 항전지 충칭에서 광복을 맞다

치장에서 1년 5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마침내 '마지막 항전지'인 충칭으로 들어갔습니다. 상하이에서부터 시작된 8년 4개월 동안의 이동 기간이 끝난 것이죠. 충칭 임시정부의 지도자는 이해 3월에 주석으로 취임한 김구였습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산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요새와도 같은 충칭에서 다시 임정 깃발 아래 모였습니다. 9월에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돼 지청천이 총사령관이 됐습니다. 1941년 11월엔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경제·교육의 균등)를 채택한 건국강령을 선포했죠.

이해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사흘 뒤인 12월 10일 임정은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후 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됐고, 미군과 함께 시안(西安)에서 한반도 진입을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1943년 미국·영국·중국의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보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이 항복하고 한국은 광복을 맞았습니다. 김구는 '왜적이 조금만 더 늦게 항복했더라면 우리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됐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임정 요인들은 이해 11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임정의 가시밭길 대장정은 도피나 유랑의 길이 아니라 눈앞에 다가온 해방과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광복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