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차현진의 돈과 세상] [91] 언어유희

bindol 2022. 10. 5. 08:07

[차현진의 돈과 세상] [91] 언어유희

입력 2022.10.05 00:00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은 말이 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이 그러하다. 이를 영어로 팰린드롬(palindrome)이라고 한다. 단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련하다, 사장집 아들 딸들아, 집장사 다하련가”처럼 문장으로도 가능하다. 웃긴다.

팰린드롬보다 조금 더 발전한 언어유희가 어크로스틱(acrostic)이다. 가로로 읽는 글의 각 행 첫머리를 세로로 읽으면 숨은 뜻이 드러나는 글이다. 우리나라의 삼행시가 그렇다.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아내에게 보낸 시의 각 행 첫 글자를 세로로 읽을 때 엘리자베스 즉, 아내 이름이 나온다. 그 암호가 풀리는 순간 웃게 된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이어 ‘거울 속으로’라는 동화를 썼다. 그 책 마지막에 시를 한 편 남겼다. 각 행 첫 글자를 세로로 읽으면 ‘앨리스 리델’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캐럴이 짝사랑한 이웃 집 여자애다. 겨우 열한 살짜리 미성년에게 연정을 품는 소아성애자로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캐럴은 금지된 사랑을 어크로스틱에 숨겼다. 사람들이 눈치 채자 캐럴은 시치미를 뗐다. 독자들은 억측을 멈추고 그냥 웃었다.

 

팰린드롬이나 어크로스틱이 서양식 언어유희라면, 삼행시나 파자(破字·글자 분해)는 우리나라 언어유희다. 김삿갓이 그 분야의 대가였다. 그런데 유희가 유희로 끝나지 않았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파자는 정국을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조(趙)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 속에서 개혁파가 숙청당했다. 기묘사화다. 웃을 수 없었다.

1519년 이 무렵 중종이 ‘주초위왕’에 대해 보고받았다. 그때 ‘위왕’을 “왕을 위해서 목숨도 바친다(爲王代死)”로 넉넉하게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다. 지레 짐작하여 글의 의도를 억측하고 굴레를 씌우면 위험하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지금 세태도 마찬가지다. 억측은 멈추고, 넉넉함과 웃음은 늘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