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렇구나

中庸

bindol 2022. 10. 9. 15:08

중은 객관적 대상세계에 있고 용은 주관적 자아세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변화되는 세계에 맞게[中] 쓰는[庸] 것이 곧 중용이라 할 수도 있으므로
이로 보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중용, 즉 ‘맞게 쓰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객관이 주관에 맞는 것[中]이 진(眞)이라 한다면, 
주관이 객관을 쓰는 것[庸]은 이(理)라 할 수 있다. 

이 진리는 중용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진리의 일차적 내용이 인의(仁義)이고 인의의 구체적인 내용이 예악(禮樂)인 것이다.

따라서, 인의의 이상을 예악으로써 현실에 중정하도록 쓰는 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은 진리의 소재(所在)이고 용은 진리의 소용(所用)이라면, 
진은 중용의 인식이고 이는 중용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의는 중용의 이상이고 예악은 중용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교의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용의 의의는 지행(知行)의 덕을 존중하고 있다.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라 했다.

또 “중용은 지요(至要)한 것이나 인간들은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라고 하여, 
중용의 도는 지와 행의 상호조화 내지는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행(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용사상의 본체론적·심성론적 논리전개를 살펴보면, 우선 주자의 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주희는 ≪주자어류 朱子語類≫에서, 성정(性情)에 대해서는 중화(中和)를 말하여 중을 도의 체(體), 
화를 도의 용(用)으로 보았고, 
또 이의(理義)에 대해서는 중용을 말하여 중은 천하의 정도로서 용(用)으로 보아 시중의 중으로 보았다. 
용은 천하의 정리로서 체로 보고 있다.

또, 중화와 중용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중화는 체, 중용은 용(用)이라 하였는데, 
이는 결국 중화는 성정으로 심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용은 그것이 행위로 드러난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중화의 ‘중’은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서, 
천부본연(天賦本然)의 성이며 천명의 성(天命之性)인 것이고, 
그것은 미발(未發)의 상태이므로 불편불의(不偏不倚)요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상태이며, 
심지체(心之體)로서 은(隱)인 것이다. 

이 미발지중(未發之中)은 곧 천명의 정으로서 천하의 대본(大本)이므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본체라 하겠다.

그리고 중화의 ‘화’는 희로애락이 절도에 맞는 것, 
즉 중절(中節)을 말하는 것이므로 천하의 달도(達道)이며, 
심지용(心之用)으로서 삼라만상에 현현(顯現)되는 것으로 비(費)라 하겠다.

한편, ≪중용≫의 첫머리에서는 천명(天命)·성(性)·도(道)·교(敎)를 말하여 
중용의 철학적 근거와 내용을 밝힘으로써 ‘치중화(致中和)이면 
천지위언만물육언(天地位焉萬物育焉)’이라는 중용의 최고·최후의 경지를 그렸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중용의 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숭고한 중용의 도는 오직 성인만이 능히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군자의 중용의 도는 해괴하거나 비현실적인 도는 아니며, 
또 일상생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다. 
일반 부부의 우(愚)로도 가히 알 수 있고 부부의 불초(不肖)로도 
능히 행할 수 있는 비근하고 평범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의 도는 일상생활의 전역에 걸쳐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역에 걸친 다양한 양상을 통일하는 근본원리의 제시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중용≫ 제12장에서 밝히고 있는 이른바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인 것이다.

주희는 비를 용지광(用之廣), 은을 체지미(體之微)라 주석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과 용, 중과 화를 비와 은으로 비교한다면, 
중용의 중은 ‘비’, 용은 ‘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는 체로서 은이요, 중용은 용으로서 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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