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무릎 배개

bindol 2022. 10. 9. 15:45

[이규태 코너] 무릎 배개

조선일보
입력 2004.12.16 18:50
 
 
 
 

동물 가운데 베개 베고 자는 것은 사람뿐이라던데 남미 유인원(類人猿)의 한 종류가 팔베개 베고 잔다는 보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인간의 원초적 휴식 자세가 팔베개였음을 암시해준다. '논어'에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세상 부러울 것 없다 한 것을 보면 인간의 가장 축소된 원초적 낙이 팔 베고 누워있는 자세랄 것이다.

그 안식을 공유하는 것이 어머니 팔베개 베고 자라는 모자(母子)간이다. 연인들이 팔베개 베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한적(漢籍)에서는 남성끼리 사랑하는 동성애를 옷소매를 자른다는 뜻인 단수(斷袖)라 하는데 팔베개에서 비롯된 고사다. 한나라 때 애제(哀帝)는 동성인 동현(董賢)을 몹시 사랑했다. 어느날 팔베개에 베워 낮잠을 재우다가 급히 일어날 일이 생겼는데 황제는 곤히 잠든 동현을 깨우지 않으려 베우던 팔의 옷소매를 칼로 자르게 하고 일어났던 것이다. 팔베개 사랑의 극치다. 불심(佛心)의 깊이를 재는 척도로 '팔베개를 몇 개 닳게 했느냐'고 묻는 관행이 있었다. 스님이나 신도들의 신앙수단으로 불경을 베끼는 사경(寫經)을 했는데 오래 잔 글씨를 쓰다 보면 팔이 굳어 마비가 되기에 이를 부드럽게 하는 팔뚝베개가 있었다. 사경으로 속세의 번뇌를 극복했던 것으로 미루어 팔베개는 고도의 정신차원의 산물이랄 수 있다. 우리 옛 기방(妓房)에서 사랑의 농도를 팔베개 사랑이냐 무릎베개 사랑이냐로 갈라 보았다. 간통사건을 심리할 때도 팔베개 베는 사이냐 무릎베개 베는 사이냐고 묻고 있다. 전자가 정신적 사랑이라면 후자는 육체적 사랑이다. 조(趙)나라 성제(成帝)의 연인인 비연(飛燕)이 아우에게 사랑을 물리고 소양궁을 떠날 때 호박침(琥珀枕) 구문침(龜文枕)은 두고 간다마는 육슬침(肉膝枕) 곧 무릎베개만은 못 놓고 가는구나 하고 한탄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베개가 무릎베개이지만 베개의 기능으로서 가장 잠 못 이루게 하는 나쁜 베개도 역시 무릎베개다.

늘어가는 독신여성을 위해 근육질 남성의 팔베개를 출시했던 일본에서 이번에는 독신남성을 위한 푹신한 여자 무릎베개를 출시했다던데 현해탄을 건너뛰는 독신문화의 작열이 아닐 수 없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