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19세 성인

bindol 2022. 10. 15. 10:55

[이규태 코너] 19세 성인

조선일보
입력 2004.06.03 18:51
 
 
 
 

장가들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 상투를 틀고 관을 씌우는 관례(冠禮)를 치르고야 성인이 됐었다. ‘경국대전’에 그 나이가 남 15세, 여 14세로 정해져 있지만 예외가 많았다. 뱃속 아이끼리 정혼하는 지복(指腹) 성년도 있고 기저귀 찬 아기끼리 정혼하는 강보(襁褓) 성년도 있으며 양가 부모 중 50세를 넘거나 병들면 12세로 성년을 낮출 수 있었으며 노동력이 아쉬우면 10세 이전에 20세 신부와 결혼하는 등 예외가 많았다. 역사시대의 성년 나이는 성적 육체적 성숙과는 아랑곳없이 가족적 경제적 이유로 기복이 컸다. 눈여겨 되돌아볼 것은 육체적 성숙이 아니라 정신적 성숙을 보장하는 성년문화가 발달했었다는 점이다.

이미 삼한시대의 예비 성년들은 청년집회소(맨스 하우스)에서 집단생활하면서 공공을 위한 노동과 국토 방위의무를 치르고서야 성년이 됐다. 관가를 짓기 위한 통나무를 어깨의 살가죽을 꿰뚫는 새끼에 메고 끌었다 했으니 대단한 고행이 수반된 성년 시련이었다. 신라의 화랑도 바로 이 성년 시련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개성 천마산 깎아지른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얹힌 안돌이 바위를 안고 돌고 등돌이 바위를 등지고 도는 담력을 과시해야 성년이 됐다.

 

조선조 초 안평대군은 백운대 정상에 나 있는 3척 폭의 벼랑 틈새를 뛰어넘는 담력으로 성인이 됐다. 동구 밖 정자나무 아래에는 들돌이 놓여있게 마련인데 장정 한 사람 무게의 들돌을 들고 열을 헤아릴 때까지 버티어야 성인의식을 통과했다. 농촌에서 남색(男色), 곧 동성애를 ‘바구리’라 했다. 농사단체인 농사(農社)의 선임자들에게 남색을 제공하는 것으로 성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고통받는 시련을 통과해야만 품값이 반품에서 온품으로 오르고 “얘, 쟤” 반말하던 마을 처녀들 길에서 만나면 얼굴 붉히며 고개 숙이는 내외를 한다.

이처럼 인고력 지구력 담력의 보장 없이는 늙어도 반품받고 아이 취급받았던 성년 철학이었다. 성년 나이를 한 살 단축하는 19세 안이 입안됐다던데 육체적 성숙만이라면 더 당겨도 되지만 고통을 참고 힘든 일 지속하는 정신력을 감안하면 더 늦춰야 할 성년 나이가 아닐까 싶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