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세 정책은 대처 전 총리가 파탄 직전이던 영국 경제를 살려낸 대표적인 회생 카드 중 하나였다. ‘대처 따라 하기’를 선거 캠페인 전략으로 삼았던 트러스 총리가 주목한 정책인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치솟는 물가와 급증하는 나랏빚, 악화하는 재정적자 같은 상황 변수를 읽지 못했다. 최악의 타이밍에 시장 흐름과 거꾸로 가는 그의 감세 정책을 놓고 “환상의 섬에서나 가능한 위험한 동화”(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트러스 총리가 취임 38일 만인 14일 결국 백기를 들었다. 고소득자 소득세 감면 정책을 접은 데 이어 법인세 19% 유지 계획을 철회해 25%로 인상하는 기존 정부안대로 시행키로 했다. 정치적 동지인 쿼지 콰텡 재무장관도 전격 경질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역대 최저치로 떨어지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국가 파산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을 버티지 못했다. 두 차례의 굴욕적 정책 유턴을 놓고 이코노미스트지(紙)는 “트러스노믹스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정책의 효과, 파장 고민 없이 외형 베끼기에만 골몰한 결과가 참혹하다.
▷영국 보수당 내에서는 트러스 총리의 일방적인 정책 독주가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보수당 중진인 마이클 고브 의원은 감세안에 대해 “보수적이지 않다”며 정책 이념을 문제 삼고 나섰다. 위기 국면에서 민심의 요구와 경제 상황에 맞춰 정책을 조정하며 쌓아온 보수당의 유연한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상당하다. ‘대처의 뚝심’처럼 포장된 독선 때문에 12년 만에 정권까지 바뀔지 모른다는 여당의 아우성이 커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