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10만 명 거란군 섬멸… 평안북도 들판서 대승 거뒀죠

bindol 2022. 10. 23. 08:35
 

[뉴스 속의 한국사] 10만 명 거란군 섬멸… 평안북도 들판서 대승 거뒀죠

입력 : 2022.10.13 03:30

강감찬과 귀주대첩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의 표준 영정.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서울 관악구가 14~16일 낙성대공원을 중심으로 '2022 관악강감찬축제'를 연다고 해요. 이 축제는 낙성대에서 태어난 고려 시대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의 역사적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행사입니다. 고려 시대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장군인 강감찬과 함께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해요.

낙타 50마리 굶겨 죽인 태조 왕건

후삼국시대였던 한반도는 고려의 태조 왕건에 의해 936년 통일됐고, 중국은 960년 건국된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에 의해 979년 통일됐습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게 골칫거리인 북방의 강적이 하나 있었습니다.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 북쪽의 연운 16주까지 세력을 넓힌 거란이었죠. 나라 이름을 요(遼)라고 지은 거란은 남쪽 송나라를 압박하며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북방 민족이 중국을 침공할 때마다 먼저 제압하려 시도한 곳이 한반도였습니다. 배후에서 공격을 당할까 우려했던 것이죠. 요나라가 942년(고려 태조 25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물하자 태조는 "발해와의 맹약을 저버린 무도한 나라"라며 사신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만부교에서 낙타를 굶겨 죽게 했습니다(만부교 사건). 고려와 거란이 화친(나라와 나라 사이에 다툼 없이 가까이 지냄)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했던 것이죠.

거란의 2차 침략과 강감찬의 등장

거란은 모두 세 차례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1차 침략은 993년에 일어났는데, 이때는 고려 6대 왕 성종 12년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에서는 서희(942~998)가 나서서 외교적 담판을 벌였죠. 서희는 적장 소손녕을 만나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니 옛 고구려 땅은 우리 것"이라며 거란에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후 고려의 내부 사정이 복잡해졌습니다. 서북면도순검사(도순검사는 고려 시대 지방에 임시 파견하던 벼슬아치를 이르는 말) 강조(?~1010)가 1009년 군사를 이끌고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진입해 7대 왕 목종을 폐위시키고 8대 왕 현종을 즉위시켰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핑계로 1010년 40만 대군을 동원해 2차 고려 침략을 강행했습니다. 강조는 통주에서 거란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거란의 대군이 곧바로 고려 수도 개경으로 몰려올 수 있는 상황이 됐습니다. 신하 중 상당수가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죠. 바로 그때, 키 작고 풍채가 볼품없는 한 신하가 나서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적의 예봉(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강감찬이었습니다. 현종은 강감찬의 말을 듣고 나주로 피란을 갔고, 거란군은 아직 북방에 건재한 고려의 군사력을 우려해 일단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기만성의 '작은 거인' 강감찬

강감찬은 고구려계 호족으로서 고려 태조를 도왔던 공신 강궁진의 아들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으며, 983년(성종 2년) 문과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합니다. 이때 나이 35세였으니, 훗날 31세에 무과에 급제해 '늦은 나이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은 이순신 장군보다 더 늦게 관직에 나섰던 것이죠.

한마디로 대기만성(大器晩成·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뤄짐)형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과가 아닌 문과라고요? 네, 고려의 강감찬·윤관이나 조선의 김종서·권율처럼 우리 역사에선 문신 출신의 유명한 장군을 여럿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감찬의 외모는 뛰어나지 않았으나 "국가 중대사를 의논할 때는 주춧돌처럼 임해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려사)고 합니다.

1009년 거란의 2차 침략 당시 강감찬의 나이는 환갑을 넘어섰고, 1018년 12월 거란이 3차 침략을 하며 총지휘관을 맡았을 때는 칠순의 노장이었습니다. 거란의 소배압이 최정예군 10만여 명을 동원해 고려를 침공한 3차 침략 때 고려는 이미 8년에 걸쳐 거란과의 전쟁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로 여겨진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을 공격하기 위해 흥화진으로 진격했지만, 이미 적의 전략을 꿰뚫은 강감찬이 매복시켜 놓은 군사에 의해 기선을 제압당했습니다.

그러나 기병을 앞세운 소배압은 뛰어난 기동성으로 신속하게 개경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개경엔 방어 병력이 적었지만 현종은 "두 번 도망가는 일은 없다"며 결사 항전을 선언했습니다. 보급로도 끊긴 채 한겨울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는 걸 깨달은 소배압은 해가 바뀐 1019년 1월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소배압은 고려군에 여러 차례 공격당하며 도주하던 중 귀주(현 평북 구성)를 지나게 됩니다. 사실은 강감찬이 다른 길을 모두 틀어막아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고려군과 거란군 총 30만명 싸워

1019년 2월 1일, 이미 이곳에 진을 친 채 기다리고 있던 71세 강감찬 휘하의 고려군 20만명이 귀주성 근처에서 거란의 최정예병과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수공(水攻·물로 공격함)이 아니었습니다. 남쪽의 고려군과 북쪽의 거란군, 총 30만명이 싸운,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야전(野戰·들판에서 벌이는 전투)이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김종현 휘하의 고려군 1만명이 불쑥 거란군 뒤에서 나타나 찌르고 들어왔습니다. 이제 전투의 구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포위한 섬멸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10만명 중 살아 돌아간 적병은 겨우 수천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 이순신의 한산대첩(1592)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으로 불리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입니다. '대첩(大捷)'은 '큰 싸움'이 아니라 '큰 승리'라는 뜻입니다. 이 전투 뒤 거란은 두 번 다시 고려를 대규모로 침공하지 못했고, 송나라를 침공해 중원(중국 중심부)을 장악하는 것도 실패했어요. 반면 고려는 몽골의 침략 때까지 약 120년 동안의 평화 속에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큰 전투 하나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바꿔놓은 것이죠.

[강감찬 생가 터 있는 낙성대]

낙성대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생가 터입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낙성대(落星垈)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이곳에는 '강감찬낙성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고려 시대의 삼층석탑과 1973년 지은 사당인 '안국사'가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백제의 근초고왕(송파구 추정), 조선의 세종대왕(종로구), 이순신(중구) 등과 함께 서울시에서 태어난 한국 위인 중 한 명입니다.
 거란의 소배압이 최정예군 10만여 명을 동원해 고려를 침공한 3차 침략 때 고려는 이미 8년에 걸쳐 거란과의 전쟁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어요. 사진은 낙성대 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 /문화재청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에요. 이곳에는 강감찬 유허비(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려 세운 비)가 세워져 있어요. /위키피디아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