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외적 침공 막는 최후의 방어성… 치밀한 계획으로 만들었죠
입력 : 2022.09.22 03:30
부소산성
▲ ①부여 시가지 북쪽에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가 부여로 천도하기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비 도성의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왕성(王城)이었어요. 노란 점선표시된 곳이 부소산성의 위치. ②부소산성은 흙과 모래 등을 다져서 쌓았어요. 부소산성의 내벽 모습이에요. ③부소산성 동문지 일대에서 출토된 금동광배. 가운데 연꽃 무늬가 입체적으로 표현돼 있어요. ④부소산성에서는 큰칼과 창, 화살촉, 대형 쇠낫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가 발견됐어요. /국립부여박물관·백제역사문화원
부여군과 백제역사문화원은 지난달 29일부터 부소산성(扶蘇山城) 서문 터를 찾기 위한 발굴에 착수한다고 밝혔어요. 부여 시가지 북쪽에 있는 해발 106m의 나지막한 구릉인 부소산에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된 8개의 유적 중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요. 부소산성은 현재 수풀이 우거지고 성벽이 허물어져 산책하기 좋은 공원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비(泗 ·오늘날 부여) 도읍기 백제의 왕성(王城·왕궁이 있는 도시의 성)이자 외적의 침공을 막는 최후의 방어성이었어요. 부소산성이 어떤 곳이고 지금까지의 발굴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는지 알아볼게요.계획적인 천도와 성벽의 축조
538년 백제 성왕은 사비로 수도를 옮겼어요. 부소산과 백마강에 둘러싸인 너른 땅 사비는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농사짓기에 적합하고, 금강을 이용해 바다로 나가 주변 나라와 교류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어요. 사비 천도는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급하게 수도를 옮긴 웅진(熊津·오늘날 공주) 천도와 달리, 치밀하게 준비돼 있었어요.
사비는 계획도시였어요. 이는 부여 지역에 남겨진 성곽이나 고분·사찰 등 중요한 국가 시설의 계획적인 배치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요. 사비 도성 북쪽과 동쪽에는 각각 부소산성과 나성(羅城)을 높게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어요. 부여나성은 돌과 흙을 이용해서 쌓은 방어시설로, 도성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도 했어요. 동쪽에 있는 성벽인 동나성 바깥에는 왕실 가족이 묻힌 부여 왕릉원이나 귀족 무덤인 능산리·염창리 고분군을 둬 죽은 자의 공간을 따로 구분했어요. 또 정림사지나 능산리사지·왕흥사지 등 중요한 사찰들을 도성의 중심지나 주요 교통로상에 배치해서 불교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고자 했어요. 도성의 북쪽과 남쪽에 흐르는 백마강은 해자(垓子·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 밖에 판 도랑이나 못) 역할을 했죠.
부소산성의 성벽은 돌이 아닌 흙을 이용해서 쌓았어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 성벽이 10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판축(版築)이라는 독특한 기술로 만들어졌기 때문인데요. 이 기술은 판자로 사각형 틀을 만든 다음, 그 안에 흙이나 모래, 자갈 등 성질이 다른 재료들을 교대로 쌓아 올리고, 다시 그것을 나무봉으로 다져서 성벽이나 제방을 쌓는 토목기술이에요. 판축으로 쌓은 성벽 안에서는 가끔씩 생활 폐기물인 토기나 기와 조각이 발견되는데요. 부소산성의 경우 동문지 조사에서 '대통(大通)'이라는 문자기와가 발견됐어요. '대통'은 중국 남조 국가인 양나라에서 527년부터 529년까지 사용한 연호예요. 사비로 천도한 538년보다 10년 정도 이른 시기에 해당하죠. 이 문자기와를 통해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기 약 10년 전부터 건물에 사용할 기와를 제작하거나 방어시설인 부소산성을 축조하는 등 계획적으로 천도를 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답니다.
도성 수호의 마지막 보루
부소산성은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어요. 백마강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휴식이나 연회의 장소로도 활용됐어요. 7세기 백제의 모습을 기록한 중국 역사책에는 "백제 왕성의 크기가 사방 1리 반"이라고 기록돼 있어요. 1리 반을 현재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약 2.6~2.7㎞가 되는데요. 실제 부소산성의 크기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부여 지역에서 이 정도 크기의 백제 성곽은 부소산성밖에 확인되지 않아요. 부소산성이 단순히 왕궁의 후원(後苑) 정도가 아니라 왕성으로서 위상을 갖추고 있었던 거지요.
부소산성 내부 조사에서는 중국 도자기를 비롯한 화려한 금속공예품, 기와지붕에 사용된 각종 장식, 고급 생활용기, 벼루와 등잔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어요. 이것으로 부소산성 내부에 살았던 백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곱돌(광택이 있고 매끈한 암석)로 만든 반가사유상이나 돌로 만든 불상의 머리 조각,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장식된 원형 광배(光背·조각상의 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것) 등도 함께 발견돼 산성 내부에 사찰 같은 불교 시설이 함께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어요.
부소산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백마강변에 있는 높이 약 40m의 낙화암(落花巖)이에요. 이곳은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나 낙화암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유사'에는 백제가 망할 때 "차라리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의자왕을 모시던 여러 후궁이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속칭 '타사암(墮死巖)'으로 불린 큰 바위가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어디에도 '삼천궁녀'라는 표현은 없어요. 백제 당시 사비 도성의 인구가 약 6만~7만명밖에 되지 않은 상황을 떠올려봐도 의자왕의 후궁이 3000명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워요. 조선 초기 문인들의 시에서 처음 낙화암과 삼천궁녀를 연관시키는 표현들이 확인되는데요. 이때의 '삼천'은 많다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 상징일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니었답니다.
[부여신궁 터에 세워진 삼충사]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일본은 일본과 조선이 한몸이라는 뜻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부소산 중턱에 '부여신궁(扶餘神宮)'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어요. 백제는 일찍부터 일본에 선진 기술과 유교·불교를 전해준 인연 깊은 나라였기 때문에, 백제의 옛 수도인 부소산에 일본의 천황을 모시는 신궁을 세우고 부여 지역 전체를 신도(神都)로 만들어 한반도 영구 지배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던 거예요.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격화하면서 신궁 공사는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한 채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중지됐어요. 1957년 부여 지역 유지들은 부여신궁 터 자리에 백제의 마지막 충신인 성충과 흥수·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삼충사(三忠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제사를 지내고 있답니다.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입력 : 2022.09.22 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