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코너] 유관순의 새 사진
40여년 전 서울 정릉 아리랑고개 막바지에 살았던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柳愚錫)옹에게 들었던 유관순 열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난다. 숨바꼭질 할 때 바로 곁에 있는 절구통 아래 숨었는데도 찾지 못했던 일을 되뇌며 몸집이 아담하고 몸놀림이 무척 날렵했던 것과 치마 길이가 발등을 덮을 만큼 긴데도 집안 어른들로부터 치마가 짧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했다. “우리 집안 씨가 본디 맵디매워 관순이도 여간내기가 아니고 온 식구가 예수를 믿는데 나만이 유학(儒學)을 고집한 것도 집안 내력이지” 했다. 관순이가 잘 불렀던 노래는 「무쇠골격 청년 남아야」와 「샘물이 돌돌아―」 하는 사나이가 부르는 우국창가(憂國唱歌)라 했다. 그러고는 감방에서 동고했던 어윤희 여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수인들 중 어린애 가진 여자에게 유관순이 제 몫의 꽁보리밥을 돌려주자 여자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나는 줄 의무가 있고 당신은 받아 먹을 의무가 있다”면서 다그친 일이며, 치마를 찢어 그 아기의 기저귀를 만들어주고 겨드랑에 끼어 말려주던 일에서 보듯 정 많은 유관순이었다.
그런저런 일로 미루어 행동이나 생각이 진취적이고 학교 활동에서도 중국 여성들의 전족(纏足)해방기금, 인도 빈곤 여학생들을 위한 학비모금, 프랑스 고아들을 위해 옷을 지어보내는 일 등 국제적으로 기독교정신을 펼쳤던 도량 큰 유관순이었다.
3·1운동의 계기가 됐던 국상(國喪)에 상하 상복차림으로 동급생과 찍은 유관순의 사진이 동기생 후손 집에서 나와 보도되었다. 그 사진 복판에 자리한 선교사 프라이 학당장은 유관순을 비롯, 한복(韓服)의 구속으로부터 한국 여성을 해방시킨 선각자다. 몇 걸음 걸으면 벗어지고 마는 전통 치마허리를 떼어내고 대신 조끼를 달아 힘껏 뛰어도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조끼치마를 고안,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 학생에게 입힌 선각자다. 태극기 흔들고 앞장서 뛰었던 유관순 정신을 육체적으로 보완한 프라이 선교사와 같이 찍혀 더더욱 싱그러운 유관순 사진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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