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자아형 인간

bindol 2022. 10. 26. 16:12

[이규태코너] 자아형 인간

조선일보
입력 2004.01.05 16:51
 
 
 
 

옛 조상들은 먼길 떠날 때 배낭에 풍류(風流)낫을 담고 떠나게 마련이다. 길 가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풍류낫을 꺼내어 길가의 소나무 밑동을 반반하게 깎고 거기에 시 한 수 써놓고 떠나간다.

누가 언제 지었다는 표식도 없다. 풍우에 지워져도 아랑곳없고 누군가 길 가다 공감해도 좋고 욕을 해도 모른다. 떠오르는 시상을 결정(結晶)하는 예술행위로 내 삶에 살점을 붙이면 그만이지 남들의 평가를 바라거나 후세에 남기고 말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예술이나 학술을 하는 동안의 뜻과 낙을 추구하는 것을 세컨드 컬처 곧 제2문화라 한다. 평생을 유람했던 김시습(金時習)과 기묘사화로 유배생활을 지새웠던 김식(金湜)이 바로 세컨드 컬처를 찾아 사는 전형적 자아형 인간들이다. 십수년 전 영국여행에서 칸나 페스티벌을 구경한 기억이 난다.

가장 많은 꽃 색깔과 꽃 모양을 개발하여 굴지의 꽃 축제로 손꼽히는 이 잔치를 일군 사람은 겨우 주급 17파운드로 지붕 밑방에 사는 홀아비 난방직공이었다. 그는 틈틈이 공원 부지에 칸나를 심어 가꾸고 변종 개량하는 낙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그 자아형 인생이 세계적 페스티벌의 결실을 맺게 한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가치(To have)에서 존재가치(To be)로의 전환을 역설했듯이 지금 한국인이 중독돼 있는 보다 많이 가지려는 양적(量的) 인생에서 뜻있고 즐거운 내 나름의 삶을 찾아 사는 질적(質的) 자아형 인간으로의 전환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고 있다는 새 기류를 신년판 조선일보에서 짚고 있다.

제2문화나 질적 인생에 눈 뜨기 시작하는 것은 GNP 2만달러에 접근할 때라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나라는 그 문턱 바로 앞에서 좌절을 겪고 허덕이고 있는 참에 이 자아형 인간군의 확인은 희망을 안겨다 준다. 이 인간군의 출현에는 많은 의식혁명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성공의 잣대가 지위나 부가 아니라 칸나할아버지처럼 어느 만큼 자신이 풍요하게 사느냐로 평가받고 교육도 입시위주의 부하(負荷)로부터 내 나름으로 뭣인가 할 수 있는 자질과 더불어 사는 사람과의 균형에 치중하게 돼 나갈 것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