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현해탄의 곡소리

bindol 2022. 10. 31. 08:29

[이규태코너] 현해탄의 곡소리

조선일보
입력 2003.09.01 16:05
 
 
 
 

정월 대보름날 밤 마을마다 이웃 마을과 돌팔매질로 편싸움을 벌여 사상자를 내곤 했다. 정겹고 친근해야 할 이웃마을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수백년 관습화되어 내려온 데는 그럴 필요성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물줄기로 위아래 마을이 논물을 대야 하기에 보(洑)싸움으로 적개심이 팽배하고, 방목하는 소가 이웃마을 밭에 들어가 작물을 해치기도 하려니와, 오이·대추·닭 서리는 이웃마을이 대상이다. 터질 것 같은 풍선에 바늘 구멍을 내어 폭발을 사전에 막듯 한 해 동안 축적되고 팽배한 이웃간의 증오심을 발산시켜 원점회귀를 시키는 관행이 편싸움이다. 이같이 이웃이나 마을끼리,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부풀어오른 불평불만이나 증오심을 엉뚱한 딴 곳에 옮겨 발산시키는 것을 전위(轉位)라 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반항을 직접 투사하지 못하고 바가지 긁는 소리로 진폭시킨다든가, 부엌에 잠자고 있는 강아지 배때기를 들이차 깨갱거리는 소리로 전위시킨 것도 그것이다.

미국의 경기가 나빠지는 것과 백인의 흑인 린치 증가와는 정확하게 반비례한다는 조사도 전위다. 바이마르 헌법 이후 독일의 경제 침체로 중소기업과 중산계급의 욕구불만이 밀도를 높여갔다. 히틀러의 나치는 이 욕구불만의 탈출구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배척, 학살을 내세워 전위시켰다. 그렇듯이 엊그제 1일로 80돌을 맞는 일본 간토 대지진 때, 각지의 재일 한국인 6000여명을 무차별 대학살했던 것도 천재지변에 의한 공포불안이 국가 기반의 안위와 연결될까봐 의도적으로 전위를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으로 3·1운동을 체험했던 미즈노(水野連太郞)가 대지진 당시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한국인의 보복이 두려웠을 뿐 아니라 당시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의 책동과 연계되는 것을 사전에 막고자, 애꿎은 재일 한국인에게 공포와 불안을 전위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유언비어에 의한 일본인들의 자위수단으로 학살을 변명하는 데 일관해왔다.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4년간의 조사 끝에 「나라가 허위사실을 전파」하여, 전위 학살에 정부가 개입한 것을 공인하고 사죄를 권고했는데도 그 한마디 듣고 싶어 80년간 현해탄을 울어 헤맸던 6000여 원혼들의 곡소리를 얼마나 더 들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