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토론 공화국

bindol 2022. 11. 9. 08:38

[이규태 코너] 토론 공화국

조선일보
입력 2003.03.06 20:31
 
 
 
 


미국 어머니들은 젖아기와 평균 15초 간격으로 대화를 하는데 한국
어머니들은 15초 간격으로 육체 접촉을 한다는 조사가 있다. 젖아기의
베이비 토크인 옹알이도 한국 어머니보다 미국 어머니의 이해가 빠르고
정확했으며 그 아기의 언어숙달도 빨랐다. 성서의 첫 머리에 「태초에
말이 있었다」했듯이 서양에서는 언설좋은 사람이 출세하지만 한국에서는
말 잘하고 말 많은 사람은 존경받지 못했다. 암묵(暗默)의 이해니 침묵의
미학이니 말 없음에 가치를 두어 말 많은 것은 과부집 종년이요, 말 많은
집은 장맛이 쓰다느니 말이 앞선 사람 일이 앞서는 일 못 보았다느니,
부정적 속담투성이다. 여느 회의 때도 약 80%의 각론 이야기만 하고
20%의 총론은 말하지 않고 암묵간에 통달하는 것이 관례다. 그래서
과묵한 것이 지도자의 품격이요, 세일즈맨도 말이 많은 것은 초보자요
노련할수록 비례해서 말이 적어진다. 말이 적은 만큼 신뢰가 대신하는
과묵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사람 대화에는 I·You·We·They같은 주어가 없고 서로 알고있는
사항은 그것 이것으로 처리하기에 외국인이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선지 동양을 소재로 한 소설 가운데 서양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펄벅의 「대지」뿐이란 사실은 시사한 바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대화
아닌 암묵으로 발전한 이유로는 첫째, 단일민족으로 언어 문화의
동질성,때문이며 둘째, 서로가 조상,대대로 붙박이로 살아와 언어 생활이
동질이기 때문임을 든다. 하지만 급진적 도시화와 서구화, 대중화,
젊은이화, 영상화, 정보화의 진행으로 이질문화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바람에 암묵으로 통하던 논커뮤니케이션 시대는 가고 있다고 본다.

토론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노 대통령의 말을 실천하듯 새 정부 첫
국무회의가 발제, 반론, 재반론 하는 식으로 3시간이라는 기록적
장시간을 끌었다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건 모두가 국가대사이기에
토론이 진지하게 지속될수록 국민들의 신뢰가 결집될 것이다.
바람직하면서 워낙 거리가 있었던 토론문화이기에 문화충격을 감지하게
된다. 다만 토론(討論)의 토(討)는 미치지 않은 구석없이 샅샅이
쫓음이요, 론(論)은 도리를 좇아 가지런하게 질서를 세우는 언어행위라는
차원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 깔리지 않고는 정착이 어려운
실험문화임을 명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