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피

bindol 2022. 11. 17. 05:29

[이규태 코너] 피

조선일보
입력 2002.11.21 20:25
 
 
 
 


경남 함안 산성에서 6세기 무렵의 신라 죽간(竹簡)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거의가 어데 사는 아무개가 당시 곡식이던 피(稗)를 보낸다는 군량미
물표였다. 죽간이란 종이 이전의 문서로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안압지
발굴 때 처음 출토됐었다. 피는 벼처럼 생겨 논에 기생하는 잡초로
못자리 때부터 피사리라 하여 그 제거에 농부의 품을 많이 소모시켜
왔지만 고대에는 중요한 곡식으로, 신라시대에는 수자리 사는 병졸의
군량미로 충당했음이 이번 죽간에서 드러나 피의 내력을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장자(莊子)는 사람의 도(道)가 피(稗)로 났다했을 만큼 인생에 시사한 바
많은 작물이다. 오곡(五穀)에 끼지 못하지만 찧으면 알곡 비율이 오곡의
어느 다른 곡식보다 크며 삶아도 늘지도 줄지도 않으니 표리가 없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알갱이는 작고 볼품은 없지만 이를 삶은 물은
해충만 골라 죽이는 살충제로 쓰기도 했으니 뼈대도 있다. 장강(長江)
삼협(三峽)에 어떤 곡식을 심어도 싹트기를 거부하는 땅이 있는데 오로지
피만 자라고, 흉년에 어떤 곡식도 다 죽는데 오로지 피만이 자라
구황(救荒)을 하니 비록 벼(禾) 가운데 비천(卑賤)하다 하여 패(稗)란
이름을 얻었지만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굽히지 않는 의연함이 있어 장자는
피에서 도를 보아낸 것이다. 한나라 때 무제(武帝)가 피 농사를 크게
장려했는데 곡식의 소용보다 이 같은 인간 품성의 함양을 위해서였다는
해석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벼농사를 짓기 전인 고조선 때부터 피농사를 지었음이
황해도 봉산 지탑리 출토물에서 확인되었다. 함북 회령 오동 등지의
기원전 유적지에서도 탄화된 피가 나온 것으로 미루어 곡식이 잘되지
않은 한반도 북방에서 피농사를 주로 지었던 것 같다. 고려 말
이달충(李達衷)의 산촌잡영(山村雜詠)에 「보리밥 그릇에 피가 반이나
섞였다」는 대목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빈곤의 상징이 돼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양가는 쌀에 떨어지지 않아 조선조에도 흉년이 들면 밥 이외에
술·엿·죽·떡도 만들어 먹었으며, 된장 원료나 기름을 짜기도 했다.
관의 문서를 멀리 나르는 비각(飛脚)은 등짐에 피 몇 줌을 넣고 다니며
먹는 백토에 섞어 흙국수를 뽑아 먹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