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신의주 特區

bindol 2022. 11. 19. 15:32
조선일보 | 오피니언
 
[이규태 코너] 신의주 特區
입력 2002.09.23 20:18:32 | 수정 2002.09.23 20:18:32

압록강 어귀인 신의주에서 강따라 북상하면 선조 때 한·중 국경표지인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던 난자도(蘭子島)가 나타난다. 옛날 사신들이 의주에서 거쳐야 했던 두 강 사이에 있는 섬 가운데 하나다. 갈라져 흘러 물살이 약해지기에 이 물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 난자도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특구였다. 여진족의 일개 부족이었던 청나라가 400여 부족을 통일하고 있던 인조 6년, 청 태종의 강요로 이 난자도에 호시장(互市場)을 세웠는데 조선땅에서 주로 말과 노새를 거둬들이는 전쟁준비의 일환이었다. 산이 많은 한국에서의 운반수단을 거둬들임으로써 전력을 약화시키는 반면에 저희네 전쟁물자 운반수단을 확보하는 저의있는 특구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 난자도를 중국사람들은 마장(馬場)으로 부르고 있다. 병자호란 후로는 정식으로 이 곳을 특구로 정해 자유무역을 했는데 밀무역이 더 극성을 부려 중강후시(中江後市)라 불렀다. 이것이 확대되어 숙종 때에는 중국 본토 내의 한·중 국경선에 책문후시(柵門後市)를 세워 무역했다. 지금도 고려문이라는 지명으로 이 특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한국상인들이 머물렀다는 각씨루라는 건물터,후예들이 집단 거주하는 고려인촌, 한국 오리의 유종이라는 고려압(高麗鴨), 한국사람이 들여와 심었다는 고려국(高麗菊) 등의 이름들이 남아있음을 보았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보면 이 의주의 후시(後市)를 핑계 대고 수백명씩 호인들이 떼지어 도강해 주로 인삼과 초피(貂皮)를 거둬 가 치부를 했다하며, 암거래가 혹심한데 관리들은 수수방관하여 「우리나라 부가 모조리 북류(北流)하고 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개탄했다. 이 특구에서 특권을 누렸던 것이 사신 따라가는 역관(譯官)들이었다. 「허생전」의 거부 변승업(卞承業)도 바로 특구의 역관 출신이다. 이 의주특구에서 돈놀이 하는 업자를 은모자가(銀母子家)라 했으며 중국의 비단·약재·꽃신·안경·문방구 등 상류층의 기호품들은 모두 이 특구의 용만객주(龍灣客主)들의 손을 거쳤던 것이다. 기생사회에서 용만객주에게 손목 한 번 잡히면 백석땅이 생긴다 했으리만큼 흥청망청했던 법외지구였다. 그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개방한다하니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임을 절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