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재상의 조건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시험을 쳐서 재상을 뽑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몇 권을 주고 그 주인공들의 인간 기미를 얼마만큼 통찰하고
있는가로 가늠했던 것이다. 정치 역량이 아니라 경륜이나 도량 같은 인간
됨됨이로 뽑았고 그것이 대영제국 유지의 기틀이 됐던 것이다.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미국의 대회사에서도 사장을 공모하는 데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경륜의 깊이를 따져 뽑는다고 들었다. 곧 뭣을 더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큼 트였느냐를 본 것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도 재상이 되는 데 경륜을 중요시했다. 선조 때 정승
이준경(李浚慶)이 재상 물망에 오른 두 사람을 데리고 택일하고자 기방에
갔다. 이 두 예비재상들이 본처 태생이 아닌 것을 알고 기생과 짜고
연출을 했다. 이(李) 정승이 짐짓 기생의 손을 잡고 "오늘밤 나와
동침하지 않으려나" 하고 수작을 부렸다. 이에 기생은 약속한 대로
"천첩이 대감을 잠자리에 모셔 자식을 낳으면 바로 이 두 영감과 같은
지체가 될 것이온데 영광이 아니겠나이까" 했다. 이 기생의 모욕적인
언사를 두고 한 예비판서는 발끈하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데 다른
예비판서는 태연하게 못 들은 척 받아넘기는 것이었다. 이 후자가
발탁되어 후에 정승까지 올랐다.
세종 때 젊어서 등과한 김종서(金宗瑞)가 형조판서에 올라 기개를
떨쳤을 때 일이다. 당시 관대하기로 유명한 영의정 황희(黃喜)는 김
판서가 조그마한 실수를 하거나 언행이 가벼우면 불러다 호되게 꾸짖고
비서 격인 구사(丘史)를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같은 정승이던
맹사성(孟思誠)은 "당대의 명신인데 어찌 그리 심하게 굴어 기를 꺾으려
드는가" 하고 따졌다. 이에 그가 재기를 믿어 거만하고 기운이 날래어
그의 큰 그릇이 다칠까 싶어 그런다 했다. 후에 황희가 김종서에게 수상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났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재(宰)는 백관(百官)의
우두머리로 천자를 보필한다는 뜻이지만 민주시대에는 온 국민의
안위화복(安危禍福)과 직결된 최고의 자리다. 그 자리에 있을 인간
자질은 고금동서가 다르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번 총리
지명자는 잘못을 시어머니나 비서에게 미루는 도덕성이 결격사유가
되더니 새 총리 지명자는 그 경륜이 청문 대상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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