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아성유감(亞聖遺感)

bindol 2022. 11. 26. 07:38

[고전 속 정치이야기] 아성유감(亞聖遺感)

천지일보

승인 2022-11-24 18:27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맹자의 유적은 산동 고도 추성(鄒城)에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맹묘(孟廟), 맹부(孟府), 맹림(孟林)으로 규모와 형식을 갖췄다. 주건물인 아성전은 4번째 원락에 있다. 높이가 17미터나 되는 이 건물의 지붕은 녹색의 유리기와로 덮었다. 사방에는 명의 홍치(洪治) 시기에 세운 26개의 거대한 8각형의 돌기둥이 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석고는 송대의 유물로 연꽃을 뒤집은 모양이다. 전각 앞 회랑에 있는 8개의 돌기둥은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했다. 정문의 4개 기둥에는 구름 속에서 유유히 노니는 한 쌍의 용과 모란, 연꽃이 새겨져 있다. 전형적인 명대 석조예술이다. 정면 겹처마 사이에 걸린 편액에는 해서체로 쓴 아성전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황금빛을 머금고 빛난다. 세로로는 맹자의 도는 공자의 고향인 니산에서 펼쳐졌다(道闡尼山)는 편액이 걸려있다. 건륭제는 이곳에 왕이라면 반드시 요순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나 안회라도 닮고 싶다(尊王言必稱堯舜, 猶世心同切禹顔)는 대련을 걸어뒀다. 정전에 앉은 맹자는 곤룡포에 면류관 차림이다. 이는 공작에 해당하는 복장이다. 공자가 소왕(素王)이라는 왕호를 받은 것에 비해 버금가는 성인인 그는 공작에 불과하다.

맹자의 적손들은 사당의 서쪽에서 산다. 북송 말기에 처음 조성됐으므로 8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지만 역대 왕조에서 조금씩 증축해 청초에 이르면 전후 7개의 원락을 형성했다. 주건물인 대당(大堂)을 경계로 안쪽은 사무실, 뒤쪽은 주거지로 모두 100동의 건물이 있다. 이 건축군은 중국의 고건물 가운데 완전하게 보존된 것으로 평가된다. 5개의 룸으로 구성된 대당은 맹자의 후손인 세습한림원오경박사의 집무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가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거나 기념행사를 거행하기도 한다. 동남쪽 모서리에는 해시계인 일구(日晷), 서남쪽 모서리에는 측우기인 가량(嘉量)이 있다. 대당의 편액인 칠편이구(七篇貽矩)는 청의 옹정제가 맹자의 65세손 맹연태(孟衍泰)에게 하사한 것이다. 대당 중앙에 있는 난각(暖閣)에는 문방사우와 도장을 넣은 케이스, 붓통 등이 있다. 좌우에는 행사를 개최할 때 음악을 연주하는 고악루(鼓樂樓)가 있다.

세은당(世恩堂)은 맹자의 72대손 맹번기(孟繁驥)의 거실이다. 중국의 전형적인 사합원식(四合院式) 건축이다. 앞쪽에 3개, 뒤쪽에 5개의 방이 있으며, 정중앙에 세은당이라는 금빛 글자로 된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다. 중당에는 맹번기 부부의 충수연(祝壽宴)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내부의 장식은 호화롭기 짝이 없으며 진열된 문물도 고색창연하다. 동쪽에 있는 방은 접견실로서 품격을 갖춘 가구를 배치해 뒀으며, 벽에는 국내외 우인들의 서화가 걸려있다. 뒷방은 맹번기의 부인 왕숙방(王淑芳)이 사용하는 침실이다. 당년의 맹자는 제나라로 가서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총장인 좨주(祭主)를 역임했다. 최고의 국빈대접을 받았지만, 제선왕과 뜻이 맞지 않자 홀연히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부귀를 버린 덕분에 명예를 얻었다. 그의 후광은 오랜 세월 부침을 거듭했다. 전제정치의 제왕들은 백성이 먼저이고, 사직은 다음이라는 그의 말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추성현 동북쪽 사기산 서쪽 자락에는 맹자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맹림(孟林)이 있다. 삼천지(三遷志)에 따르면 북송 경우(景佑) 4년(1037)에 공자의 45대손 공도보(孔道輔)가 이곳에서 맹자의 묘를 발견하고 그 옆에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동안 맹자는 잊혀진 존재였던 셈이다. 맹자는 송대에 이르러 간신히 되살아났다. 금, 원, 명대를 거치면서 중수와 확장공사가 계속됐다. 그러나 맹자를 가장 높이 받든 군주는 청의 강희제였다. 맹림에 우거진 1만여 그루의 잣나무는 그가 심은 것이다. 느긋한 공자에 비해 맹자는 강력한 언어로 군주들을 질타했다. 그를 제대로 알아준 사람은 이민족인 청의 군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