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다
기초과학연구원의 중이온가속기
138억년 전 빅뱅의 순간에 접근
꿈의 암 치료, 구겨지는 금속 개발
일자리·먹거리 지도 바꿀 수 있어
양양 지하동굴선 암흑물질 탐색
1년에 한두 번 나타나는 신의 흔적
존재 입증하면 일등 국가로 도약
축적의 시간엔 반드시 보상 따라
기다려 주고 지원하되 간섭 마라
기초과학에 나눠 먹기는 안될 말
“핵(Nuclear)이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탈원전 정책은 잘못됐다. 첨단 기술은 모두 위험하다. 시속 300㎞로 운행하는 KTX 고속철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것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 기술 아닌가. 100% 안전하냐고 물으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비행기를 타는 것은 이를 통해 가치 있는 일을 편리하고 쉽게, 더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 요소가 있지만, 원자력을 버리는 것은 국가적으로 어마어마한 손실이다.” (10월 20일 자 한국대학신문 인터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모든 가치 있는 문명은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위험을 통과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근원의 본향이거나 경이의 세계다. 그곳으로 여행 과정에서 인간은 희열과 전율을 느낀다.
문·사·철·수·물·화·생(문학·역사·철학·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은 문명 발전의 디딤돌이자 경이로운 여행의 길 안내자다. 문·사·철을 순수 인문학이라 하고, 수·물·화·생을 기초과학(basic science)이라 부른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되어 있다. 우리 몸도 핵으로 가득 찼다. 그 자체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핵은 물리학자(1911년 러더퍼더 박사 등)들이 자연을 이해하려다 발견했다. 핵의 성질을 기술적으로 응용한 것이 원자력(atomic power)이다. 정치적 결정으로 원자력이 흉기로 바뀐 게 원자폭탄이고, 평화적인 문명의 이기로 활용된 게 원전이다. 원전의 위험은 원자력 공학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됐다. 원전 사고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 소홀과 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핵의 축복을 논할 차례다. 기초과학자들은 원자와 핵, 그보다 더 작은 초극미(超極微) 세계, 아예 보이지 않는 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작은 세계일수록 답을 찾기가 어렵다. ‘신의 입자’처럼 살짝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곤 한다. 그래도 기초과학자들의 탐험은 계속될 것이다. 홍승우 성균관대 교수(물리학)는 "핵은 아직 불분명하다”고 말한다. 영어로 "Nuclear is still unclear”라고 했다. 알파벳 첫 두 글자 Nu를 un으로 바꾸니 핵의 세계가 불분명(unclear)에서 새롭게 분명한(new-clear) 세상으로 넘어가는 중간계임을 확연히 깨닫게 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경계를 파고들어 138억년 전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초극미 탐험자들의 목표다.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줄 대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건설 현장.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빅뱅 이후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중 인간이 알고 있는 물질은 5% 미만이라고 한다(김영덕 기초과학연구원 소속 지하실험연구단장). 나머지 95% 이상은 미지의 영역. 그중 27% 정도가 오직 중력에 의해서만 존재가 인식되는 암흑물질이고, 68%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지만, 우주의 팽창 속도 측정에 의해 이론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암흑에너지, 이른바 반중력물질이다.
지하실험연구단 김영덕 단장은 빅뱅 초기에 생성된 암흑물질의 실체를 찾고 있다. 우주 탄생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될 첫 인류라는 점이 예순 살 학자를 소년처럼 흥분시킨다. 세계 속에서 한국 기초과학의 위상이 도약할 뿐 아니라 응용과학과 상업 기술에 미치는 파급 효과도 측량하기 어렵다.
김 단장은 암흑물질 후보군 중 하나인 윔프(WIMP) 입자 검출로 연구 방향을 잡았다. 윔프는 주변의 모든 잡음 신호(라듐 등이 내는 방사능)가 제거된 상태에서 요오드화 나트륨(Nal) 결정과 반응해 반짝 빛을 한번 내고 사라진다. 1년에 몇 번 나올까 말까 한 빛의 신호를 잡아채 데이터로 만들어 분석하는 인내의 싸움이다. 극도로 미세한 신호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방사선 등 모든 전자기파를 차단하는 게 성패의 관건이다. 고순도 요오드화 나트륨 검출기를 지구 상에서 가장 깊숙한 곳, 지하 깊숙이 숨겨 놔야 할 이유이다.
강원도 양양의 700m 지하 동굴에 있는 암흑물질 검출 실험실. [전영기 기자]
이 공간에 들어서니 빨간 불빛만 비추는 게 한밤중 해부학 실험실 같은 느낌이었다. 가로·세로·높이가 3m쯤 되는 육면체가 방을 꽉 채웠다. 양양 취재의 최종 목표인 ‘COSINE Detector’라고 불리는 암흑물질 검출 장비다. 미국에서 개발된 검출 시스템의 전체가격은 약 50억원. 이 장비 안에는 암흑물질만 오롯이 있게 하기 위해 맨 가에서부터 우주선 검출기→납→구리→액체 섬광체 순으로 된 차폐막들이 차례로 에워쌌고 한가운데 Nal 검출기가 놓여 있다고 동행한 김봉희 연구원이 설명했다. 연구단은 새로운 Nal 검출기를 자체기술로 개발할 예정이다.
김영덕 단장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줄 대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조감도.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IBS는 지하실험연구단 말고도 ‘RNA연구단(단장 김빛내리)’ ‘유전체향상성연구단(명경재)’ ‘뇌과학이미징연구단(김성기)’ ‘나노입자연구단(현택환)’ ‘기후물리연구단(악셀 팀머만)’ 등 모두 28개 연구단이 한국 기초과학의 대표선수로 노벨 과학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시 138억년 전 빅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암흑물질 탐색이 우주 탄생 때부터 있던 물질이 지구에 나타나기를 지하동굴 속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방식이라면 ‘차세대 중이온가속기(RAON)’ 프로젝트는 빅뱅 후 지금까지 우주에서 생성된 물질을 인공적으로 구현해 원소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을 밝혀 보겠다는 능동적 접근법이다. 당연히 다른 실험실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공간과 초강력 에너지 발생 장치가 필요하다. 대형 국책사업, 빅 사이언스란 말은 그래서 붙었다.
홍승우 교수
민동필 명예교수
대통령과 정권이 교체됐다 해서 기초과학의 진실이 바뀌는 건 아닐 것이다. 인류의 삶을 이롭게 하면서 국부를 증진할 대표적인 원천 기술로 민 교수가 꼽은 건 세 가지. 첫째가 원전에서 나오는 고준위 핵폐기물의 반감기를 수십만 년에서 수백 년 수준으로 낮추는 기술이다. 둘째가 희귀 동위원소를 활용해 암세포를 추적·제거하는 기술이다. 셋째는 아이언맨 갑옷같이 가벼우면서 구겨질 수 있는 초강도 신물질의 개발이다. 원천 기술은 2차, 3차 파생 기술을 끝없이 창출해내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만 성공해도 대한민국의 먹거리, 일자리 지도가 바뀔 수 있다.
기초과학에 성공한 국가들의 3대 특징은 시간과 돈과 탤런트에 대한 아낌 없는 투자라고 한다. 그런 나라의 정부는 기다려 주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고, 고급 두뇌들이 신나게 연구할만한 환경을 보장해 주었다. 축적의 시간 뒤엔 반드시 보상이 뒤따랐다. 부민강국(富民强國)은 그렇게 성취된다.
요즘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풀뿌리 기초과학’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만들어 기초과학계를 불안하게 하는 모양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좋은데 글쎄 풀뿌리 기초과학은 잘 모르겠다. 원자력 공학의 성취를 탈원전이란 미명 하에 태양광 비즈니스 업자들이 1/n로 나눠 갖는 광경을 보고 있는 터라, 풀뿌리 기초과학론이 지난 10년간 나름대로 잘 굴러가던 기초과학 집중 투자를 1/n로 나눠 먹기 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과학자들에게 축적과 집중·몰입의 자유를 허락하라.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