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 저마다 ‘헤지외교’ 필사적
우린 동맹·우군 외면, 북한에 몰빵하나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1 1923년 5월 27일생, 만 95세. 헨리 키신저가 이번 주말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탄다. 측근들은 “연령을 고려할 때 아마 마지막 비행기 탑승이 될 것”이라고 한다. 목적은 제1회 ‘새 경제포럼’ 참석. 사실상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 대화다. 중국 지도부가 깊숙이 개입했다. 베이징에서 열기로 했다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싱가포르로 장소를 돌렸다.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주도 아래 폴슨 전 재무장관 등 친중파가 대거 참석한다. 중국 우호세력 총동원이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편도에 24시간 가까이 걸리는 여정에 노정객 키신저를 태운 것은 중국이 미·중 무역전쟁에 얼마나 필사적인지 보여준다”고 입을 모은다.
#2 지난달 26일 미·일 정상회담장. “자, 그럼 일·미 물품무역협정(TAG) 협상을 하는 동안에는 일본 자동차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것, 맞죠?”(아베 일 총리). 이미 실무협의를 통해 합의된 내용이었다. 그래도 아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트럼프에게 쐐기를 박으려 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정색한 채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노(No)!” 배석한 일본 측 관계자들은 그 순간 얼어붙었다고 한다. 잠시 뜸을 들인 뒤 트럼프는 말했다. “오케이. 아베는 내 친구니까.” 그제야 일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베를 포함한 당시 일본 측 배석자 모두 “트럼프가 언제 또 마음을 바꿀지 모르겠구나”란 생각을 굳히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견원지간이던 중국과 일본이 손잡게 한 일등공신은 당연히 트럼프다. 중국은 ‘럭비공’ 트럼프에게 맞서기 위해, 일본은 ‘보험’을 들기 위해 서로의 지렛대를 찾았다. 미국은 그런 중국을 향해 이달 초 ‘경제 전면전’을 선포했다. 희생을 감수한 전면전이다. 우리가 북한 문제에 시선을 고정하는 동안 동북아 역학관계는 팽팽 돌아간다.
당장 미국의 미묘한 변화를 보자. 북핵에 올인하는 듯하던 트럼프의 태도가 변했다. 최근 백악관 NSC를 찾은 한 관계자는 “NSC 측 발언의 80%가 중국이라 놀랐고, 북·미 협상에 대한 불만보다 한국에 대한 불만이 커 놀랐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도 문 대통령이지만 청와대 스태프(참모진)들이 과연 미국을 진정한 동맹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비건 대북특별대표가 29일 이례적으로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면담을 요청한 배경일 수 있다. 북·미 간 신뢰를 걱정할 때가 아닌 게다. 진짜 걱정은 한·미 간 신뢰다.
일본과는 30일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로 당분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중국과 러시아와는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관계다. 유럽에선 뜬금없는 ‘대북제재 완화 협조 요청’ 발언으로 ‘이상한 나라’가 돼 버렸다. 북한을 빼곤 어느 곳 하나 확실한 우군이 없다. 한·미 동맹이란 뼈대 위에 주변국 외교를 통해 살을 붙여 가는 게 아니라 살을 도려내고 뼈대까지 금가게 하고 말았다.
북한·핵만 볼 때가 아니다. 미·중 냉전의 직격탄은 당장 경제를 통해 온다. 유독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한국 금융시장이 그걸 보여준다. 언제 자동차 고율 관세라는 한 방이 나올지 모른다. 우리 경제가 무너지면 북핵이고 평화고 말짱 도루묵이다. 도와줄 나라도 없다. 중국처럼 키신저를 비행기에 태울 힘도 없다. 그렇다면 미·중 대결 장기화에 대비한, 현실을 직시한 ‘헤징(위험 회피) 외교’가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도 지금은 ‘일단 남북교류!’를 외치며 미국에 맞설 게 아니라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오만한 북한에 ‘너희가 먼저 비핵화!’를 재촉하는 게 온당한 순서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