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마음읽기] 인생의 운영체제

bindol 2018. 10. 31. 05:52


나도 모르는 새 한 덩어리로 굳는 경험들
사회에 넘치는 ‘냉소 운영체제’ 안타까워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청춘의 설렘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이다. 따지고 보면 둘 다 경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처음 해보는 일, 처음 느끼는 감각이기에 떨리고 설레고, 처음 겪는 실패와 좌절이기에 더 쓰리고 아프다.
 
그러나 경험이 반복되면 누구라도 무뎌진다. 두 번째 사랑은 첫사랑보다 덜 황홀하고, 두 번째 실연은 첫 번째 실연보다 덜 충격적이다. 그것을 삶이 회색빛으로 퇴색하는 과정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과 외양이 의젓하게 성숙해가는 과정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에는 고민거리가 너무 많다. 상대가 헤어질 때 인사하며 지었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몇 시간이고 숙고한다. 문자메시지 답장을 몇 분 만에 하는 게 적절할지 몰라 끙끙댄다. 해석과 선택이 하나하나 스트레스가 된다.
 
두 번째, 세 번째 연애에서는 덜 고민한다. 무의미한 정보를 거르고 여러 상황에 두루 쓰일 수 있는 대응 전략을 경험을 통해 익혔기 때문이다. 그런 전략을 따르면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가 덜 든다. 물론 개개인의 경험에는 늘 빈 곳이 있고, 세상에 완벽한 전략은 없기에 오판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여러 방면에서 쌓은 대응 전략들이 머리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된다. 인간과 사회, 세계에 대한 이해가 어떤 일관성을 갖추고 체계를 이룬다. 나중에는 전에 겪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에 대해서도 그 생각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반응하게 된다. 이런 틀을 인생관이나 가치관, 세계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용이 좋건 나쁘건 이런 인생관, 세계관이 들어서면 당사자는 어쨌거나 살기가 편해진다. 엉성하게라도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으면 그만큼 덜 혼란스럽고, 두루뭉술하게라도 자신만의 대응 전략이 있으면 고민거리도 줄어든다. 청년기의 스트레스 상당 부분이 그렇게 사라진다.
 
마음읽기 10/31

마음읽기 10/31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일이다. 각자 이르는 경지는 다를 테지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같다고 본다. 생각의 묶음 다발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가는 것이다. 운영체제가 탑재되는 것이라고 비유해도 좋을 것 같다. 그 운영체제가 외부 자극에 빠르고 정확하게 반응하면 내공이 깊다는 찬사를 얻고, 엉뚱한 결과를 고집스럽게 출력하면 꼰대라는 핀잔을 듣는다.
 
어지간한 운영체제로는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다. 일어나는 사건도, 그 아래 깔린 갈등도 전에 보지 못했던 종류가 많아 그렇다. 그렇게 산업화 세대도 꼰대가 되고 민주화 세대도 꼰대가 됐다. 그들을 꼰대라고 부르는 젊은이들도 머지않아 꼰대 소리를 들을 것이다. 새로운 사건과 갈등은 더 많이 벌어질 테니.
 
요즘 나는 대단히 오류가 많은 운영체제가 한국 사회에 퍼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어떤 외부 자극에도 냉소로 응답하는 운영체제다. 세상만사 비웃기로 작정하면 못 비웃을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일견 이 운영체제는 꽤나 정확해 보인다. 해야 할 일도 명확히 알려준다. 바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일시적 쾌감도 주고 자존감까지 지켜준다.
 
냉소는 술과 같다. 가끔 몇 잔 즐기면 생활에 활력을 주지만, 내내 취해 있으면 삶이 망가진다. 술도 냉소도 중독성이 있다. 그 독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끝없이 다음 술잔, 다음 냉소의 대상만 바라게 된다. 알코올중독자가 많은 사회가 좋게 발전할 리 없다. ‘냉소 운영체제’가 넘치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운영체제가 퍼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이 집단적 무력감에 휩싸여 있기 때문 아닌가 한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사회 문제의 벽이 너무 높고 절망스러워 보인다. 상당수 청년들이 15년이 넘는 학교생활과 이후의 조직 말단 생활에서 욕망과 선택의 주체가 돼보지도 못한다. 무력감에서 냉소가 비롯되고, 그 냉소가 다시 무력감을 불러온다.
 
어찌해야 할까? 생뚱맞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근력운동을 추천한다.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하는 스쿼트, 플랭크, 푸시업은 좁은 공간에서 맨손으로 할 수 있다. 몸은 정직해서, 반드시 결실이 생긴다. 하루 10분씩 한 달만 해도 배가 단단해지고 체형이 바뀐다.
 
근육만큼이나 자신감이 생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 달 어치 자신감을 밑천 삼아 다른 프로젝트에 도전할 수도 있겠다. 성취감을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사회이니, 그렇게라도 경험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 감각을 각자 생각의 틀 속에 밀어 넣고, 보다 유능한 운영체제로 우리 삶도 한국 사회도 바꿔보자는 것이다.
 
장강명 소설가 

[출처: 중앙일보] [마음읽기] 인생의 운영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