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강 언덕 저녁 산보

江皐夕步 披襟來古渡 피금내고도 漁舍暝烟黃 어사명연황 林背飛初月 임배비초월 船頭帶晩凉 선두대만량 水禽喧夜響 수금훤야향 岸芷越風香 안지월풍향 日暮佳人隔 일모가인격 相思枉斷腸 상사왕단장 강 언덕 저녁 산보 옷깃 헤치고 오래된 나루터 찾아와보니 어부 집에는 저녁연기가 노랗게 핀다 숲 뒤편으로 초승달이 날아오르고 뱃머리에는 저물녘 한기가 스며 있다 물새는 밤의 적막을 깨며 소리를 내고 언덕의 꽃은 바람을 타고 향기 풍긴다 해는 지고 아름다운 사람은 멀리 있어 그리움에 공연히 속만 태운다 정조 순조 연간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인 薑山 李書九(1754∼1825)가 지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한강 가로 나갔다. 옷자락 바람에 날리며 도강객으로 붐비던 나루터에 나가보니 어부의 집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누르스름하게 피..

[가슴으로 읽는 한시] 살아있는 병풍

奉和酉山 畫屛不願借人模 화병불원차인모 千疊生陳造化圖 천첩생진조화도 列岳疑抽生彩筆 열악의추생채필 雙江可挹灌香廚 쌍강가읍관향주 雲舖似海潮方進 운포사해조방진 烟澹如塗潤未枯 연담여도윤미고 張放四時無捲日 장방사시무권일 春晴偏近煮茶爐 춘청편근자다로 살아있는 병풍 병풍은 남의 솜씨 빌어다가 그릴 필요 없어서 조화옹이 그린 그림 겹겹이 날로 쳐놓았네 늘어선 산은 살아있는 채색 붓을 뽑아놨는가? 두 줄기 강은 부엌에 쓸 물로 길어가도 좋겠군 밀물이 밀려오는 바다처럼 구름이 깔렸고 마르지 않고 촉촉한 길처럼 안개가 아늑하네 사철 내내 활짝 펴서 걷어놓을 때가 없지만 화창한 봄날 차를 끓이는 화로 곁은 유독 다가오네 19세기 전반의 저명한 승려이자 시인인 초의(草衣·1786~1866) 선사가 썼다. 두물머리에 사는 시인 정..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밤의 대화

夜話同文卿德考同賦 酒國眞堪世事除 주국진감세사제 仙筇頻到白雲廬 선공빈도백운려 山人病起三旬後 산인병기삼순후 園樹花飛四月初 원수화비사월초 微月蒼茫生石澗 미월창망생석간 殘棋錯落伴床書 잔기착락반상서 明時才器還無用 명시재기환무용 空掩柴門賦子虛 공엄시문부자허 밤의 대화 술의 나라 머물면 세상일이 물러가기에 지팡이가 흰 구름 속 집을 자주 찾아가지. 산 사람이 한 달 만에 병석에서 일어나보니 동산 나무는 사월 초라 꽃잎이 흩날리네. 작은 달은 아스라이 계곡에서 떠오르고 바둑돌은 평상 위에 책과 함께 흩어졌네. 태평성대라 재능 있어도 쓸데가 없나니 사립문을 닫아걸고 자허부나 지으려네. 子虛賦 / 司馬相如가 지은 賦 정조 때의 시인 기천(杞泉) 김석손(金 孫·생몰년 미상)의 시이다. 매화를 무척 좋아하여 명사들로부터 매화..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첫여름 풍경

初夏卽事 蒺藜花發松花落 질려화발송화락 潮减今年雨未慳 조감금년우미간 剡剡稻秧正可念 염염도앙정가념 離離梅子齊堪攀 이리매자제감반 出窠乳燕領襟好 출과유연령금호 登箔大蠶頭脚頑 등박대잠두각완 橋上行人有詩意 교상행인유시의 捋鬚不去看靑山 날수불거간청산 첫여름 풍경 남가새 꽃이 피고 송홧가루 떨어지며 조류 줄어든 올해에는 비가 흠뻑 내렸다 반들반들 볏모는 정말 사랑스럽고 주렁주렁 매실 열매 일제히 따도 좋겠다 둥지 나온 제비 새끼 목과 깃털 어여쁘고 채반에 오른 큰 누에는 머리며 꼬리가 힘세다 다리 위에 행인은 시심이 솟아나서 수염 꼬며 자리 뜨지 못하고 청산을 바라본다 구한말의 명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은 1891년을 전후한 무렵 강화도에 잠깐 머물렀다. 송홧가루 날리는 철이 지나고 들에는 비가 제법 내렸다. ..

[가슴으로 읽는 한시] 구안실에서 밤에 대화를 나누다

苟安室夜話 淸夜相携花下謌 청야상휴화하가 圓蟾已復現山河 원섬이복현산하 凉添麻麥垂垂露 양첨마맥수수로 風掠池塘灔灔波 풍략지당염염파 諸子論懷宜有述 제자논회의유술 良辰回首易輕過 양신회수이경과 曲欄西畔千絲柳 곡란서반천사류 一倍婆娑影更多 일배파사영갱다 구안실에서 밤에 대화를 나누다 맑은 밤 함께 모여 꽃 아래서 노래하니 둥근 달이 벌써 돌아와 산하를 밝히누나 삼과 보리에는 한기가 맺혀 이슬방울이 송골송골 연못에는 바람이 스쳐 물결이 살랑살랑 자네들은 품은 생각 속 시원히 털어놓게 좋은 철은 머리 돌리면 쉽게 훌쩍 지나가지 굽은 난간 서쪽에는 버들가지 천 가닥이 곱절로 너울대며 그림자가 더 많이 진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1901년에 지었다. 구례에 있는 구안실(苟安室) 매천의 집에 친구들이 모..

[가슴으로 읽는 한시] 평릉역 역사의 기둥에 쓰다

題平陵舘柱 一官都是爲身謀 일관도시위신모 束帶逢迎愧白頭 속대봉영괴백두 造化爐前煩祝禱 조화노전번축도 他生願作海中鷗 타생원작해중구 평릉역 역사의 기둥에 쓰다 관직 하나 완전히 내 몸 위해 마련했건만 관대 띠고 과객 맞자니 백발에 부끄럽구나 조물주의 화로 앞에 귀찮게 축원하노니 다른 생에는 바닷가의 갈매기로 만들어주오 이름을 알 수 없는 평릉역 역관(驛官)이 지은 시다. 평릉역은 강원도 삼척의 바닷가에 있던 오래된 역으로 현재는 동해시 중심부가 된 곳이다. 역의 기둥에 이 시가 쓰여 있었는데 역관이 소회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어렵사리 관직 자리 하나 꿰찼다. 그런데 하급 관료가 되고 나니 관대에 관모를 차려입고 역을 찾아오는 높고 낮은 벼슬아치..

[가슴으로 읽는 한시] 관악산 꽃 무더기 (冠峀花層·관수화층)

冠峀花層 / 관악산 꽃 무더기 躑躅花爭發 척촉화쟁발 朝曦又照之 조희우조지 滿山紅一色 만산홍일색 靑處也還奇 청처야환기 得意山花姸 득의산화연 簇簇繞峨嵯 족족요아차 莫愁春已暮 막수춘이모 霜葉紅更多 상엽홍갱다 앞다퉈 핀 철쭉꽃 위로 아침 햇살 내려 쪼인다 온 산 가득 붉은빛이라 파란 데가 외려 멋지다 제철 만난 산꽃은 어여쁘게 한 무더기 또 한 무더기 꼭대기까지 에둘렀다 봄이 저물까 걱정일랑 아예 말게나 단풍 들면 붉은 빛이 더 퍼질 테니 —신경준(1712~1781) 1760년 봄에 철쭉이 만발했다.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이 한강 북쪽에 위치한 첨학정(瞻鶴亭)에 앉아 관악산을 바라보니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 산은 벌겋게 불이 난 듯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붉은 철쭉! 그런데 붉은색 일색이라 그런지 군데군..

시대를 한탄한다(歎時)

歎時 / 시대를 한탄한다 形獸心人多古聖 형수심인다고성 形人心獸盡今賢 형인심수진금현 擾擾東華冠帶士 요요동화관대사 暮天風雨奈君恩 모천풍우내군은 생김새는 짐승이나 마음은 사람다운 자는 먼 옛날 성인 가운데 많고 생김새는 사람다우나 마음은 짐승인 자는 오늘날 현자가 다 여기에 속한다 서울 길을 왁자하게 헤치고 가는 의관이 화려한 분들이여 비바람 몰아치는 저문 하늘의 임금님 은혜는 어찌 하는가 ―서기(1523~1591) 조선 선조 때 충청도 공주에 살던 서기(徐起)란 학자가 경구처럼 쓴 시다. 그는 양반집 종이었으나 학문이 뛰어나 존경받던 특이한 사람이다. 그가 서울 거리를 기세 좋게 헤치고 다니는 고관들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나라를 책임진 그들은 생김새도 의관도 화려하여 부러움을 살 만한 외형을 갖추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