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26

“살아남는 게 승자” 조선과 일본 사이 절묘한 실리외교

“살아남는 게 승자” 조선과 일본 사이 절묘한 실리외교 중앙일보 입력 2021.03.26 00:23 지면보기 ‘여덟 얼굴’의 대마도 일본 대마도에 있는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의 막부(幕府) 장군에게 파견한 외교사절을 가리킨다. 대마도주가 조선 정부와 일본 막부의 연락 역할을 했다. [사진 한명기]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다. 왜란 이후 조선 사람이 가장 증오한 존재는 물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였다. 그런데 조선이 히데요시 못지않게 혐오한 대상이 있었다. 바로 대마도(對馬島)다. 왜란 이후 조선 신료 중에는 대마도를 정벌해서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대마도는 오지인 데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그는 과연 매국노였나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그는 과연 매국노였나 중앙일보 입력 2021.03.12 00:25 지면보기 명·청 교체기의 조선 외교 1619년 3월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과 후금군의 대치 장면을 그린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충렬록(忠烈錄)』에 실렸다. [중앙포토]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 사람들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곧 무너진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세력이 커지면서 명과 조선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본래 명의 지배를 받았던 누르하치는 1583년 군사를 일으키더니 1588년 건주여진을 통일한다. 깜짝 놀란 명은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졌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청일전쟁 때 참패한 중국, “해군력 키워라” 총력전

청일전쟁 때 참패한 중국, “해군력 키워라” 총력전 중앙일보 입력 2021.02.26 00:22 지면보기 백령도 앞까지 출몰한 중국 함정 1894년 9월 압록강 부근에서 일어난 서해해전 장면. 청나라 북양함대가 일본 함대에 크게 패했다. [사진 『도설 만주제국』(도쿄·1996)] 1886년 8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마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 소속 함정 4척이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항에 입항했다. 함정들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이끄는 함대에는 청나라가 자랑하는 대형 순양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8월 13일, 나가사키 거리 구경에 나섰던 청 수병들과 일본 경찰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 일본 측은 술 취한 청 수병들이 폭력을 휘둘러서 ..

1300년 내려온 오만과 편견…“조선은 우리의 신하”

1300년 내려온 오만과 편견…“조선은 우리의 신하” 중앙일보 입력 2021.01.29 00:51 업데이트 2021.01.29 10:18 지면보기 일본의 한반도 폄훼 일본의 대표적 역사왜곡인 임나일본부설을 그린 두루마리 족자다. 4세기 일본의 신공황후가 왜군을 이끌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렸다. [중앙포토] 753년(신라 경덕왕 12년) 1월 1일, 당나라 봉래궁(蓬萊宮)에서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식장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 누가 더 서열이 높은 자리에 서느냐를 놓고 빚어진 갈등이었다. 애초 당 조정은 서반(西班)의 서열 1위에 토번(吐蕃) 사신, 2위에 일본 사신을, 동반(東班)의 서열 1위에 신라 사신, 2위에 ..

홍치중의 송곳 질문 “왜인은 교활? 우리 책임은 없나”

홍치중의 송곳 질문 “왜인은 교활? 우리 책임은 없나” 중앙일보 입력 2021.01.15 00:23 업데이트 2021.01.15 06:05 지면보기 일본은 영원한 원수인가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귀무덤)에서 살풀이는 하고 있는 모습. 왜군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가 영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총을 만들었다. [중앙포토] 흔히 한국과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강제 징용자 배상 판결 문제와 얽힌 일본의 수출 규제, 한국의 ‘노 저팬 운동’, 그리고 며칠 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과 그에 대한 일본의 반발 등이 맞물리면서 2021년 오늘 두 나라는 진짜 ‘가깝고도 먼 나라’가 돼버렸다. 두 나라 국민의 상호 감정과 인식도 더 냉랭..

임진왜란·한국전쟁·BTS, 중국의 속내는 그대로였다

임진왜란·한국전쟁·BTS, 중국의 속내는 그대로였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01 00:25 지면보기 항왜원조와 항미원조를 넘어 임진왜란의 판세를 바꿔놓은 제2차 평양성 전투를 그린 ‘평양성 전투도’(부분).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은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1월 3일(음력), 선조는 의주 용만관(龍灣館)에서 명군 참모 유황상(劉黃裳)을 접견했다. 두 사람은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유황상은 선조에게 일본이 쳐들어온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선조는 “명나라를 치는 데 동참하라는 일본의 협박을 거절하는 바람에 침략을 받았다”고 답한다.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다가 먼저 침략을 당했으니 명이 조선을 원조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