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26

연전연승 충무공 “왜군 동향부터 파악하라”

연전연승 충무공 “왜군 동향부터 파악하라” 중앙일보 입력 2021.08.14 00:10 지면보기 임진왜란 승부 가른 정보전 한국영화 역대 최대 관객(1761만)을 기록한 영화 ‘명량’(2014)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 충무공은 무엇보다 첩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전투에 앞서 왜군의 동향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중앙포토] 음력 1518년(중종 13) 8월, 조선 조정에서는 속고내(束古乃)라는 여진족 추장을 체포하는 문제를 놓고 한바탕 논란이 빚어진다. 함경도 회령(會寜) 근처에 살던 속고내는 1512년 부하들을 이끌고 갑산(甲山) 지역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했던 자였다. 당시 조선은 속고내를 붙잡아 응징하려 했으나 그가 도주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6년 ..

“수·당 백만 대군 격파” 국가 자존심의 원천

“수·당 백만 대군 격파” 국가 자존심의 원천 중앙일보 입력 2021.07.30 00:35 지면보기 ‘고구려의 후예’ 자처한 조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살수대첩 시각물. 중국 수나라 대군에 맞선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지략이 돋보였다. [사진 전쟁기념관] “당신 나라에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당(隋唐)의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기에 신은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은 용병에 뛰어났고, 병졸들은 윗사람을 친애(親愛)했기에 솔선하여 그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구려는 한 귀퉁이에 치우친 소국이었지만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던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시대 학자이자 관료였던 최부(崔溥·1454∼1504)가 남긴 『표해록(漂海錄)』의 1488년(성종 19..

청나라 신문물에 눈뜬 왕자, 아들을 적으로 본 인조

청나라 신문물에 눈뜬 왕자, 아들을 적으로 본 인조 중앙일보 입력 2021.07.16 00:22 지면보기 소현세자는 왜 급사했을까 퓨전사극 ‘추노’(2010) 초반에 소현세자로 등장하는 배우 강성민과 소현세자 초상.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중국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익히며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도 눈을 떴다. [사진 KBS·중앙포토] “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었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선혈(鮮血)이 흘러나왔다. 검은 헝겊으로 얼굴의 반쪽만 덮어 놓았는데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색깔을 분변할 수 없어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 음력 1645년 6월 27일자 『인조실록』의 내용이다. 3..

은 수십만냥 빼앗아간 명 “은사다리도 바쳐라”

은 수십만냥 빼앗아간 명 “은사다리도 바쳐라” 중앙일보 입력 2021.07.02 00:32 지면보기 1608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일행을 그린 반차도(班次圖). 그림 왼쪽 가운데 가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명나라 사신이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올 때는 사냥개처럼 갈 때는 바람처럼(來如獵狗去如風)/ 모조리 쓸어가니 조선 천지 텅 비었네.(收拾朝鮮一罄空)/ 오직 청산만은 옮길 수 없으니(惟有靑山移不動)/ 다음에 와서 그림 그려 가져가리.(將來描入畫圖中)’ 음력 1602년(선조 35) 3월, 조선을 다녀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을 수행했던 동충(董忠)이란 인물이 남긴 시구다. 고천준이 조선에 온 것은 명에서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고천준은 의주로 입국한 순간..

17세기 네덜란드 지배 이후 동아시아 화약고 400년

17세기 네덜란드 지배 이후 동아시아 화약고 400년 중앙일보 입력 2021.06.18 00:24 지면보기 ‘뜨거운 감자’ 대만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중국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 언덕에 있는 정성공 동상. 정성공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승리하며 대만을 정복했다. [중앙포토] 지난달 21일, 한·미 정상회담 직후에 나온 공동성명과 지난 14일 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모두 대만(臺灣) 문제가 언급됐다. 두 성명에는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중국은 이번 성명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한·미 양국에 대해 “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이므로 외부 세력은 간섭하지 말고 언행에 신중을 기하라”고 경고했다. G7 공동성명이 나온 다음 날인 지난 ..

조총에 쓰러진 조선, 무기 약하면 피눈물 흘린다

조총에 쓰러진 조선, 무기 약하면 피눈물 흘린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04 00:38 지면보기 족쇄 풀린 한국 미사일 사거리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상설 전시관. 임진왜란 때 사용된 왜군 조총과 조선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 등이 보인다. [뉴스1] 1543년(중종 38) 8월 25일, 일본 규슈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 사람이 탄 중국 선박이 표류해 오면서 일본에 조총(鳥銃)이 전해진다. 당시 16살밖에 안 된 다네가시마의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다카(種子島時堯·1528∼1579)는 이 신무기에 열광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조총 두 자루를 구매했다. 도키다카는 철장(鐵匠)에게 조총을 분해한 뒤 모방해서 만들 것을 지시했다...

조선 백성 수탈한 모문룡, 그의 송덕비 세운 인조

조선 백성 수탈한 모문룡, 그의 송덕비 세운 인조 중앙일보 입력 2021.05.21 00:22 지면보기 정묘호란 화근 된 명나라 무장 17세기 초반 조선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에서 광해군으로 나온 이병헌. 음력 1621년(광해군 13) 7월 25일, 광해군은 한밤중임에도 중신들을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毛文龍·1576~1629)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압록강 너머의 진강(鎭江·오늘날 단둥)에서 사달을 일으켰다는 의주 부윤(府尹·조선시대 지방 관아인 부의 우두머리)의 급보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조선 군신들이 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긴급했던 사건의 전말은 무엇인가. 당시 진강은 후금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20일, 진강성에..

홍경래·헤이하치로 불사설, 그 씨앗은 집권층의 부패

홍경래·헤이하치로 불사설, 그 씨앗은 집권층의 부패 중앙일보 입력 2021.05.07 00:38 업데이트 2021.05.07 14:24 지면보기 19세기 초반 한·일 양국의 민란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조선 집권층의 지역 차별에서 시작됐다. 당시 난 집압에 투입된 군병들의 상황을 기록한 ‘홍경래진도(洪景來陣圖)’. 조선 후기 군대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조선 후기의 평안도는 매우 역동적인 지역이었다. 국내 상업과 대외무역이 활발해지고 광업과 수공업도 발달하여 경제력이 크게 신장했다. 경제력이 커지면서 곳곳에 서당이 보급되고 문무(文武)의 재능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인물들이 대거 나타났다. 자연히 정치적 입신을 꿈꾸며 과거에 응시한 사람도 크게 늘었고, 18세기 이후에는..

“광해군에 양위” 15번 남발, 신하들 충성 맹세 끌어내

“광해군에 양위” 15번 남발, 신하들 충성 맹세 끌어내 중앙일보 입력 2021.04.23 00:27 지면보기 임진왜란으로 민심을 잃은 선조는 세자 광해에게 조정의 권한을 일부 넘긴다.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조의 선언에 광해는 석고대죄를 하며 용서를 빈다. 영화 ‘대립군’(2017)에서 광해로 나오는 여진구(오른쪽)와 남의 군역을 대신하며 먹고 사는 대립군의 수장(이정 재) 모습이다. 선조는 한양 경복궁을 떠나 개성·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굴욕의 피란길에 오른다. [중앙포토] 임진왜란을 맞아 서울을 버리고 파천 길에 올랐던 선조의 하루하루는 고단했다. 그가 의주에 머물고 있던 음력 1592년 10월, 어떤 사람이 상소했다. “전하께서 인심을 잃어 오늘의 화가 생겼는데 왜 빨리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시..

“청에 끌려간 백성 잊었나, 고관들 사치 가당찮다”

“청에 끌려간 백성 잊었나, 고관들 사치 가당찮다” 중앙일보 입력 2021.04.09 00:45 지면보기 병자호란 직후의 의인 허박 조선의 신궁(神弓)을 내세워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 영화 ‘최종병기 활’. 포로로 잡힌 피로인(被擄人) 가운데 여성들이 겪은 고통이 더욱 극심했다. 음력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는 송파의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는다. 홍타이지는 항복을 받은 뒤 전승 축하 잔치를 열었다. 청 왕자와 장수들은 활쏘기 시합을 벌이고 술잔을 돌리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그들이 잔치를 벌이는 동안 인조는 근처의 밭 가운데 앉아 홍타이지의 지시를 기다렸다. 해 질 무렵이 돼서야 궁궐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