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6〉 6·25전쟁 휴전협정 4개월 후, 미국의 전략기지 대만을 방문한 미국 부통령 닉슨과 공항을 떠나는 대만 총통 장제스. 1년 후 미국과 대만은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했다. 1953년 11월 11일 오후, 타이베이 쑹산(松山)공항. [사진 김명호] 5·24 반미운동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원인은 시위대의 성조기 모욕과 미 대사관원 구타, 기밀문건 탈취, 타이베이 경찰국 진입, 반정부 구호 등 다양했다. 미 대사관 측은 군중들이 난입하자 외교부에 전화로 사정했다. “상황이 험악하다. 대사관원 17명은 지하실로 피했다.” 부장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는 치안기관에 협조를 구했다. 헌병사령부와 경비총국은 기다려 보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예궁차오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걱정만 하다 산회했다. 군중, 미국 대사관 성조기 끌어내려 외교부에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미 대사관은 가관이었다. 난입한 군중이 집기와 타자기, 의자들을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난장판을 만들어버렸다. 성조기도 끌어내렸다. 군중들은 속이 시원했던지 박수를 보냈다. 지하실에서 발견된 미 대사관 1등서기관 면상에 주먹을 날리자 구경만 하던 경찰관이 황급히 나섰다. “외교관 구타는 큰일 난다” 며 뜯어말렸다. 취재 중이던 미국 기자도 멱살을 잡혔지만 옆에 있던 중국 기자 덕에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장징궈는 장시성(江西省)의 오지 현장 시절, 대만의 3배가 넘는 전 지역을 짚신 신고 누비며 서민의 민원을 청취했다. 이런 습관은 대만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5시 정각, 대만 위수사령부가 미 대사관 지역에 계엄을 선포했다. 경찰 대신 군인들이 대사관 문전에 포진하자 잠시 가라앉았던 군중들이 다시 술렁거렸다. 1시간 후 방어선이 무너졌다. 군인들은 치외법권 지역인 미 대사관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다. 폭도로 변한 시위대는 내실에 있던 무전 시설과 암호 해독기를 파괴해버렸다. 가는 쇠꼬챙이 든 사람이 커다란 금고 앞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잠금을 해제했다. 기밀문건들을 부댓자루에 쏟아붓고 귀신같이 사라졌다. 대담하고 날렵함이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공동방위조약 체결 후 지룽(基隆)항에 하역되는 미군 군수물자. [사진 김명호] 대사관 주변에 있던 군중 일부가 미 공보관 쪽으로 몰려갔다. 공보관은 미국인 전용 도서관 뒤에 있었다. 시위대는 도서관 서가에 있는 책들을 밖으로 집어 던졌다. 게양된 성조기도 온전치 못했다. 공보관은 국부 쑨원(孫文·손문)을 기리는 중산당(中山堂)과 마주하고, 사이에 3,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이 있었다. 인근에 신문사와 경찰국, 미군 협방사령부(協防司), 미군 고문단 등 중요기관이 많았다. 현장에 있던 홍콩 신문천지(新聞天地) 기자 웨이다강(魏大剛·위대강)이 구술을 남겼다. “오후 7시 정각, 무장부대가 협방사령부와 미 공보관 문전에 진을 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경찰국이 시위군중을 체포했다. 무능한 경찰국으로 돌격하자.’ 이 한마디에 공보관을 때려 부수던 시위대는 방향을 틀었다. 경찰국을 포위했다. 경찰 측은 좋은 말로 시위대를 달랬다. 대표 몇 명이 직접 들어와서 체포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라며 문까지 열어줬다. 군중은 완강했다.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해산을 거부했다. 갑자기 경찰국 차고에서 불길이 솟았다. 동시에 광장에 있던 학생들이 경찰국 2층으로 내달았다. 총성이 울리고 난동분자 1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는 타이베이 기상국에 근무하는 39세의 평범한 말단 공무원이었다. 시위의 성격이 변하자 국민당은 긴장했다. 통치 기반의 동요를 용납하지 않았다. 류즈란(劉自然·유자연)사건에 관한 동정적 보도나 방송을 중지시켰다.” 1957년 5월 24일 오후, 미 대사관 승용차를 뒤집어 엎는 시위자들. [사진 김명호] 보고를 받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진노했다. 무장 병력을 타이베이 전역에 배치하고 통금 실시를 지시했다. 자정이 되기도 전에 거리가 조용해졌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사건을 처음 보도한 기자는 중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위수사령관과 헌병사령관, 경무처장은 옷을 벗었다. 대사관 앞에서 현장을 지휘했던 헌병대교(우리의 대령) 류궈셴(劉國憲·유국헌)도 날벼락을 맞았다. 현재 대만의 유명 출판인인 아들의 회고를 소개한다. “아버지가 나와 엄마에게 하소연했다. 상부에 진압 여부를 물어도 확답을 주지 않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며칠 후 아버지는 장제스 총통에게 불려가 온갖 꾸지람 듣고 군에서 쫓겨났다. 집에 돌아와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더니 평소 신줏단지처럼 여기던 훈장들 들고 거리에 나가 패대기쳤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황급히 뛰어나갔다. 남이 볼세라 수습해 들어오며 저 인간이 드디어 미쳤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공장 창고로 이사했다. 불쌍한 아버지는 매일 붓글씨만 썼다. 1년 후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아버지를 불렀다. 밤늦게 말끔한 군복에 중장 계급장 달고 싱글벙글하며 들어와 깜짝 놀랐다.” 류궈셴만이 아니었다. 군문을 떠난 일선 지휘관들은 1년 후 2계급 승진과 함께 복직했다. 대사관 금고에서 기밀문건을 탈취한 특무요원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논공행상이 있을 때마다 수상자 명단에서 빠지는 법이 없었다. 5·24 반미운동에 책임을 지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한 행정원장 류홍쥔. [사진 김명호] 하루 만에 끝난 5·24 반미운동은 류홍쥔(劉鴻鈞·유홍균)내각의 총사퇴로 일단락됐다. 미국 언론은 장제스와 장징궈 부자에게 맹폭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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