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8〉 양셴이(뒷줄 오른쪽 다섯째)의 집에는 늘 문화인들이 붐볐다. 뒷줄 왼쪽 첫째가 혁명만화가 딩충(丁聰). 둘째는 명 극작가 우주광(吳祖光). 앞줄 오른쪽 둘째는 마오쩌둥이 볼 책을 골라주던 싼롄(三聯) 총경리 판융(范用). [사진 김명호]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새벽, 베이징 지수이탄(積水潭) 의원의 내과 병동에서 94세의 품위 있는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뉴스였다. 10여분 후 기자들이 병원을 포위하다시피 했다. 이튿날, 중국 홍콩 대만은 물론이고 온 중화권의 매체가 양셴이(楊憲益·양헌익)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 명의 문화 노인이 세상을 등졌다. 양셴이는 서구문화에 정통한 혁명가이며 중국의 마지막 사대부였다.” 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에 실린 저명작가 왕멍(王蒙·왕몽)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을 접했다. 구시대가 배출한 최후의 대가 양셴이의 죽음을 계기로 많은 생각을 해봤다. 영결식에 문화명인 1000여명 운집 진사·총독 줄줄이 배출한 명문가 양셴이와 테일러의 결혼기념 사진. 1941년 2월 전시수도 충칭(重慶). [사진 김명호] 우리 세대에게 그의 이름은 하늘을 받쳐주는 기둥이었다. 업적도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중국을 통째로 번역한 사람’ 한마디면 족하다.” 29일 오전 10시 바바오산(八寶山)에서 열린 영결식은 볼만했다. 장쩌민(江澤民·강택민),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원자바오(溫家寶·오나보), 시진핑(習近平·습근평), 우방궈(吳邦國·오방국) 등의 조화가 줄을 잇고, 말로만 듣던 문화 명인 천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1960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배려로 자녀와 함께 모교 옥스퍼드대학을 찾은 테일러. [사진 김명호] 양위장은 20세가 되기 전에 아편에 손을 대고 화류계를 출입했다. 일본에 게이샤라는 멋진 여인들이 있다는 소문에 귀가 번쩍했다. 부친의 다섯째 부인을 찾아갔다. 일본 유학 가겠다며 아버지에게 잘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경극 배우 출신인 미모의 여인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평소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집안 장남의 간곡한 청에 입이 벌어졌다. 걱정하지 말라며 용돈까지 듬뿍 쥐여줬다. 베이징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명배우 황쫑잉(黃宗英)은 테일러의 절친한 친구였다. [사진 김명호] 양위장은 숙부의 한마디에 돌변했다. 귀공자의 풍모를 되찾고 정도를 걸었다. 선양(瀋陽) 전신국장을 거쳐 톈진의 중국은행 행장에 취임했다. 북양군벌의 창시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와 죽이 맞았다.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금융업은 날로 번창했다. 아들 없는 것 외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1915년 1월 초 아들이 태어나자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보낸 첫아들 셴이의 관복을 걸어놓고 열흘간 잔치를 했다. 그리고 5년 후 눈을 감았다. 문혁 초기의 양셴이와 테일러. 문혁시절 4년간 고초를 겪었다. 1967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런던에 도착한 양셴이는 신문사부터 찾아갔다. 희랍어와 라틴어 가정교사 구한다는 광고를 냈다. 1년간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옥스퍼드대학에 무난히 합격했다. 옥스퍼드에는 20여명의 중국 학생이 있었다. 훗날 양셴이와 결혼한 그래디 테일러가 회고를 남겼다. “나는 선교사였던 아버지 덕에 베이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던 중 양셴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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