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7〉 1978년 12월 27일, 대륙과 수교 5일을 앞두고 대만과 단교 선후책을 협의하기 위해 방문한 미 국무차관의 차량을 둘러 싸고 계란을 던지며 시위하는 대만의 대학생과 군중들. 약 3만명이 청천백일기와 영문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사진 김명호]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5·24 반미운동이 당일로 그친 것이 애석했다. 훗날 지인에게 토로했다. “내가 뒤처리를 할 수 있었다면 군부대를 동원해 군중을 진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부대 이동은 장징궈의 동의가 없으면 어림도 없었다. 장징궈를 거치지 않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유일했다. 미 언론, 장징궈가 시위 사주 의심 장제스도 미국과 미군의 횡포에 불만이 많았다. 류즈란(劉自然·유자연)의 사망을 핑계로 미국대사관을 공격했다. 예상치 않았던 기밀문건 탈취와 외교관 구타가 장제스를 압박했다. 직접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언론을 제물로 삼았다. 장징궈의 묵인하에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기자는 공산당으로 몰렸다. 5년간 옥살이를 했다. 1978년 5월 20일 중화민국 6대 총통 취임식을 마친 장징궈. 왼쪽은 전임총통 옌자간(嚴家淦) 부부. 장징궈는 무슨 행사건 부인을 동행하는 법이 없었다. [사진 김명호] 뉴욕타임스가 장징궈의 사주를 암시했다. “대만은 처음에 공산당이 선동한 결과라며 증거를 찾는 중이라고 발표했다. 하루 만에 말을 바꿨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이런 조직적인 폭력 사태를 일으킬 사람은 대만에 한 사람뿐이다. 소련에서 장기간 특수 훈련을 받은, 머리 구조가 세밀하고 복잡한 공산주의자가 국민당 고위직에 있다.” 기자의 방문을 마치고 촬영에 응한 천잉쩐. 1982년 6월,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5·24 이후 대만과 미국의 군사동맹은 공고해졌다. 모순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국의 군사력과 물질문명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였다. 불만과 동시에 흠모의 대상이었다. 중심가 중산베이루(中山北路)는 타이베이의 5번가였다. 상점 진열대에 미국 물건이 넘쳤다. 미군 전용 향락업소가 난립했다. 해만 지면 미군들은 주지육림에 빠졌다. 대만과 단교 후 미군기지에서 거행된 마지막 국기(성조기) 하강식. [사진 김명호] 항상 집안에 친구들이 들끓었다. 하루는 손님이 한 명밖에 없다 보니 의심을 샀다. 새벽 3시에 정보기관원들이 들이닥쳤다. 호구조사 나왔다며 집안을 뒤졌다. 번역소설 “톰 소여의 모험”을 증거로 통을 연행했다. 통은 이 소설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따졌다. 심문관의 대답이 엄청났다. “표지를 똑바로 봐라. 저자가 마크 트웨인(馬克吐溫)이다. 마르크스(馬克思)의 친척이다. 너는 사상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통은 13개월 만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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