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9〉 다이가 세상을 떠난 후 양셴이(앞줄 오른쪽)는 황먀오즈(가운데)의 서화와 산문을 즐기고, 딩충(앞줄 왼쪽)의 시사만화에 심취했다. 2000년 봄, 베이징. [사진 김명호] 1935년 12월 양셴이(楊憲益·양헌익)는 이집트를 여행했다. 밤에 안내인과 사막으로 갔다. 피라미드를 보자 술 생각이 났다. 술잔에 어른거리는 은빛의 달을 삼키다 보니, 꿈인지 인간 세상인지 황홀했다. 안내인이 은화 한 닢에 앞날을 봐 주겠다는 바람에 두 닢을 냈다. 눈감고 하늘 바라보던 안내인이 입을 열었다. “앞에 바다가 보인다.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가 초조한 모습으로 너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 수많은 사연과 모험이 너와 금발의 소녀를 기다린다.” 양셴이에 빠진 영국인 친구 약혼녀 당시 영국에는 중국의 문화와 정치적 사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중인 중국 학생들이 중국학회를 만들었다. 100명 정도가 일주일에 한두 번 모였다. 술과 노는 것에 열중하던 양셴이는 중국학회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에야 가입했다. 학회 운영은 회장과 비서가 도맡았다. 비서는 나이가 제일 어린 양셴이 몫이었다. 회의 기록과 잔무를 도맡았다. 어린 시절 다이나이디에가 아버지 품에 안겨 찍은 가족사진. 1921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양셴이는 술집 다니며 영국인들과 어울렸다. 학회 가입신청서를 내밀면 거절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1937년 7월,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양셴이는 중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며 굴원(屈原)의 장시(長詩) 이소(離騷)를 영어로 번역했다. 중국학회는 영국 전역의 대학도서관에 이소 영역본을 자비로 배포한 양셴이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회장 선거 때 몰표를 줬다. 2년 만에 회원이 2000명으로 늘어났다. 양셴이는 조국의 항일에 관한 신문을 만들었다. 하루에 한 장씩, 낮에 편집하고 밤에 인쇄해서 런던으로 보냈다. 런던에는 800여명의 화교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때 군수공장 노동자로 영국에 온 사람들이다 보니 영문 독해가 불가능했다. 중국어 신문을 받고 다들 좋아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규탄하는 영문잡지도 만들었다. 영국과 미국의 대학 도서관은 물론, 톈진의 일본군 사령부에도 보냈다. 영국 유학 경험이 있는 사령관은 짓궂은 놈이라며 유려한 문장에 혀를 내둘렀다. 1993년 3월, 양셴이(왼쪽 둘째)는 마더 테레사(왼쪽 첫째), 전 필리핀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오른쪽 첫째)와 함께 홍콩 중문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사진 김명호] 하루는 영국 친구가 양셴이를 찾아왔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 그래디 테일러를 소개했다. “베이징에서 태어나 7살 때 영국으로 왔다. 중국 역대 시인들의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이 꿈이다.” 훗날 테일러는 양셴이와의 만남을 기록으로 남겼다. “죽림칠현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한 눈빛에 얼굴은 뽀얗고 창백했다. 손이 어찌나 예쁘고 고운지 악수하자고 손 내밀 자신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나를 매료시킨 베이징의 화려한 점포와 등불이 떠올랐다. 나는 자전거도 못 타고 수영도 할 줄 모르는, 12살 전까지 집 안에서만 생활한 중국 귀공자의 해박한 지식과 예절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중국 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양셴이는 내게 다이나이디에(戴乃迭)라는중국 이름도 지어줬다.” 중일전쟁 시절의 양셴이와 다이나이디에. 1943년 가을, 전시 수도 충칭(重慶) 교외. [사진 김명호] 귀국 후 양셴이는 술과 번역에만 매달렸다. 영문으로 둔갑한 자치통감(資治通鑑),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등 100여 종의 고전들이 해외의 중국 연구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문화부가 요청한 중국 문학사 번역으로 곤욕을 치를 뻔한 적이 있었다. 양셴이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한 황당하고 가소로운 책이었다. 외국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마오 어록을 빼버렸더니 분량이 반으로 줄어들고 내용도 훌륭했다. 문화부에서 난리가 났다. 총리 저우언라이가 순수한 학자의 적의 없는 행동이라고 두둔하는 바람에 없던 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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