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6·25 참전 펑더화이 “지상 전쟁은 중요치 않아…승패는 하늘서”

bindol 2020. 6. 13. 06:31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0〉

중공은 5대 이상을 격추한 전투기 조종사에게 1급 전투영웅 칭호를 줬다. 왕하이(왼쪽)는 미군 전투기 5대를 격추하고, 4대를 폐물로 만들었다. 특급영웅이었다. 오른쪽은 2급 전투영웅 자오징원(焦景文).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31년이 지난 1984년 7월, 중국 국방부장 장아이핑(張愛萍·장애평)이 인솔하는 군사대표단이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 미군 수뇌부와의 회담 첫날 장아이핑이 왕하이(王海·왕해)를 소개했다. “우리의 공군 부사령관이다.” 육군참모총장 위컴과 나란히 앉아있던 공군참모총장 가브리엘이 놀란 표정 짓더니 황급히 일어났다. 경이로움에 흥분을 감추기 힘든 모습이었다. 왕하이 앞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한국전쟁 때 바로 그 왕하이냐? 당시 나는 한국 창공에서 너의 부대원들에게 호되게 당했다.” 두 사람은 감격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양손 맞잡고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항일 때 국민당 공군 지원 못 받아
일본 패망 후 항공학교 설립 구상

퉁화에 최초 항공 교육기관 간판
신중국 선포식서 전투기 선보여

6·25 때 공군 지원 주저한 스탈린
류야러우 공군사령관 “출격 준비”

얘기는 몇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공은 원래 공군이 없었다. 장정 시절, 국민당 공군이 하늘에서 쏟아붓는 포탄과 총격은 공포도 그런 공포가 없었다. 국·공합작으로 일본군과 싸울 때도 중공 주력부대인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은 국민당군의 공군력을 지원받지 못했다.

파괴된 일본군 비행기 긁어모아

모금으로 구입한 전투기와 함께 시가행진하는 모습이 한동안 유행했다. 1952년 봄,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중공은 동북에 항공학교 설립을 구상했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백일몽을 꾸던 당원들을 동북에 잠입시켰다. 동북 각지에 굴러다니던 파괴된 일본 비행기와 유류, 항공부품 등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말과 소를 동원해 지린(吉林)성 퉁화(通化)로 운반했다. 중공은 비행지식이 있는 사람은 적과 아군을 따지지 않고 우대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효과가 있었다. 중국어가 가능한 일본군 조종사와 정비사 300명이 통째로 투항했다. 노련한 항공술과 교육방법이 탁월한 전문가들이었다.

1946년 3월 1일, 중국인민해방군 역사상 최초의 항공 교육기관인 동북민주연군항공학교(東北民主聯軍航空學校)가 퉁화 벌판에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3개월 후, 비행기는 본 적도 없는 초등교육만 마친 학생 631명과 항공기 100여 대를 놓고 조촐한 입학식을 열었다. 말이 좋아 100여 대지 수리해서 쓸 수 있는 전투기는 30여 대에 불과했다.

왕하이의 회고 일부를 소개한다. “1946년 6월 20세 때 동북민주연군항공학교에 입학했다. 모든 조건이 열악한 시절이었다. 매일 기름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탕과 야채에 죽과 옥수수만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 애들 주먹만 한 찐빵이 한 개씩 나왔다. 겨울에는 영하 40도가 기본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입 언저리에 얼음이 달려있었다. 그래도 동사한 사람은 없었다. 여름에는 아끼느라 신발을 신지 않았다. 맨발로 비행기에 올랐다. 항공유가 절대 부족했다. 즐거운 일도 있었다. 하얼빈에서 생산하던 고순도(高純度)의 주정(酒精)을 항공유로 대체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큰 통으로 잔뜩 구입했다. 비행기에 주유한 기억은 없지만 물을 적당히 섞으면 향기가 기가 막혔다. 몇 모금 마시면 천국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다들 즐겨 마셨다. 특히 일본 교관들이 좋아했다. 일본 교관들은 한때 우리의 적이었지만 정말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출격 대기 중인 중국지원군 전투기. 1951년 가을, 단둥(丹東). [사진 김명호]

1949년 8월, 항공학교는 전투기 조종사 126명과 기술 간부 434명, 총 56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왕하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항공학교를 졸업했다. 2개월 후,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이 열렸다. 열병 막바지에 전투기 17대가 베이징 하늘을 수놓았다. 참석자들은 왕하이를 비롯한 신중국 조종사들의 위용에 혀를 내둘렀다. 생각지도 않았던 광경에 어찌나 놀랐던지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신중국 선포 3주 후,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제4 야전군 참모장 류야러우(劉亞樓·유아루)를 공군사령관에 임명했다. 류야러우는 소련과 인연이 깊었다. 부인도 모두가 부러워하던 미모의 소련 여인이었다. 소련과 담판했다. 전투기 437대의 외상구매와 항공전문가 878명의 파견을 요구했다. 소련은 류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덤으로 항공학교 6개 설립 지원까지 받아냈다. 류는 알아주는 협상가였다.

공군 설립 과정을 보면, 중국인들 동작 느리다는 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1949년 11월 11일 공군사령부가 설립되자 중앙군사위원회는 첫 번째 임무를 부여했다. “실전에 투입이 가능한 전투기 조종사 300명 이상을 1년 안에 양성하라.” 공군 혼성여단 중대장 왕하이는 대원 훈련에 몰입했다. 훈련이 한창일 무렵 북한군이 탱크 몰고 38선을 깨버렸다.

중국인 만만디? 공군 창설 속전속결

회의를 마친 공군사령관 류야러우(앞줄 왼쪽 둘째)와 중국지원군 공군사령관 류쩐(앞줄 오른쪽 첫째). 앞줄 오른쪽 둘째는 공군사령관 우파셴(吳法憲). [사진 김명호]

신중국은 당황했다. 참전 결정이 내려지자 군사회의를 열었다. 회의 분위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참석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회의장에 침묵이 계속됐다. 성질 급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류야러우를 지목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우리가 장정할 때와 다른 세상이다. 땅에서 하는 전쟁은 중요하지 않다. 하늘에서 승패가 결정 난다. 스탈린은 마오 주석에게 공군 지원을 약속했지만 파견은 주저할 것이 분명하다. 조종사가 포로가 될 경우 소련의 참전이 드러나고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공군 오기만 기다려야 한다. 공군사령관의 의지가 궁금하다.” 류야러우는 배에 힘을 주고 펑더화이에게 대답했다. “안심하기 바란다. 소련 공군의 출동 여부에 매달리지 않겠다. 우리 공군은 어떤 난관과 위험도 삼킬 수 있다. 즉각 출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도하했다. 류야러우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지원군 공군사령관감을 찾았다. 난징(南京)군구 공군사령관 류쩐(劉震·유진)을 베이징으로 불러올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