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항일전쟁 시절 미국 화교들이 미국인들에게 모금한 돈으로 중공 근거지 옌안에 세운 뤄싼지(로스앤젤레스의 음역) 탁아소는 중공과 미국 우호의 상징이었다. [사진 김명호] 무슨 전쟁이건 득실(得失)은 있기 마련이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6·25전쟁처럼 참전국의 득실을 헤아리기 힘든 전쟁도 드물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 4개국 중 영국은 득실이 비슷했다. 많은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미국의 참전에 동조했다는 소리 듣기엔 충분했다. 미국이 보기엔 이랬다저랬다 할 때가 많았지만, 기본은 미국 편이었다. 중국과도 크게 척질 행동은 안 했다. 국군과 미군의 38선 돌파를 적극 찬성하면서도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자는 주장은 바꾸지 않았다. 미국은 20년간 중국과 등져 손실 38선을 넘은 후엔 38 이북을 비군사구역(非軍事區域)으로 설정하자는 묘한 주장도 했다. 유엔에서 중국의 지위 회복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중국대표를 초청하자고 목청을 높인 것도 영국이었다. 미국의 함대 파견도 찬성하지 않았다. 베이징 측 관방대표들과의 관계도 단절된 적이 없었다. 얄밉고 현명한 처신 덕에 정전 후 홍콩 문제로 중국과 마찰을 빚지 않았다. 무역량도 늘어났다.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4개월 후 대만을 방문, 기독교가 세운 둥하이(東海)대학 건설 파토(破土)의식에서 첫삽을 뜨는 미국 부통령 닉슨. 1953년 11월 중순 타이중(臺中). [사진 김명호] 미국은 한동안 득보다 실이 컸다. 우방인 한국을 포기하지 않는 바람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조직과 나토군 사령부 설립이 순조로웠다. 새로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적대시한 것은 전략상 착오였다. 미·소 냉전 시절 미국은 적이 적을수록 유리했다. 북의 남침과 거의 동시에 대만해협을 봉쇄하고,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38선을 넘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그치는 것이 현명했다. 압록강까지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중국도 참전을 쉽게 결정할 이유가 없었다. 1946년 3월 4일, 국·공내전 조정을 위해 옌안을 방문한 미국의 마샬 원수와 경극을 관람하는 마오쩌둥. 4년 후 한국에서 적으로 돌변하리라곤 상상도 못 할 때였다. [사진 김명호] 세계대전과 6·25라는 국제전을 치른 후에도 인간은 전쟁 동물의 속성을 버리지 못했다. 지구 상에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돼도 미국은 40년간 유엔군 명의로 작전을 펼 수 없었다. 20년간 중국과 등진 것도 미국엔 큰 손실이었다. 진흙 구덩이에 빠진 미 C47 수송기를 끄집어내는 중국 농민들. 1945년 10월 광시(廣西)성 난닝(南寧). [사진 김명호] 소련이 청구한 13억 달러를 갚기 위해 1965년까지 허리띠를 졸라맸다. 영화 구경이라면 몰라도, 국제사회에 공짜는 없었다. 정전 후 서구에 떠돈 일화가 있었다. “트루먼의 측근이 신기 내린 집시 무당을 찾아갔다. 이 여인은 1952년에 소련과 전쟁이 벌어진다고 예언했다. 한국 덕에 미·소 전쟁이 무산됐다.” 무당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6·25전쟁 때문이었다. 가장 큰 소득은 따로 있었다. 미·중 관계 단절로 중·소 분쟁 시절 중국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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