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중국 드라마로 유명해진 삼국시대 위인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236~290년)은 오(吳)나라를 꺾고 전국을 통일한 진 무제(晉武帝)다. 집권 초기 율령 정비 등으로 '태강(太康)의 치(治)'를 이뤘다는 극찬을 받았지만 말년에 유희와 쾌락에 빠져 스스로 진나라 쇠퇴를 불러왔다는 혹평을 받았다. 진 무제 주변에서는 충신 장화(張華)와 간신 순욱(荀勖)·풍담(馮紞)이 임금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였다. 한 임금이 명군과 혼군의 모습을 동시에 보일 때 혼군의 길로 안내한 이는 다름 아닌 간신들이다.
무제가 뒷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장화는 황제의 친동생 사마유(司馬攸)를 천거했다. 자신과 태자 자리를 다퉜지만 그의 뛰어남에 대해서는 무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음락(淫樂)에 빠진 무제는 나라의 미래에는 관심을 끊은 지 오래였다. 결국 이 일로 장화는 지방의 군사직으로 쫓겨난다.
문제는 그곳에서도 장화는 잘 다스려 존경을 받게 됐고 이 소식은 무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다시 장화를 조정으로 불러 중용하려 했다. 이때 풍담이 무제와 독대해 이렇게 말했다. "장화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폐하께서 믿고 써주신 때문입니다. 장화 같은 자는 칭찬만 받아왔기에 자신이 낸 계책은 잘못된 것이 없고 자신이 이룩한 공은 상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슬쩍 "부왕(父王) 때 종회(鍾會)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도 실은 상당 부분 부왕이신 태조 때문입니다"라고 무제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 렸다. 무제가 크게 화를 내자 풍담은 관(冠)을 벗어 빌며 말했다. "신이 듣건대 수레를 잘 모는 자는 반드시 여섯 마리 말에 맨 고삐의 완급을 적절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흠 없는 장화를 억제해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무제는 자신을 은근히 추켜올려 주는 농간에 마음이 쏠렸다. "그대의 말이 옳다." 그 이후 장화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