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배광정(裵光庭)은 염린지(閻麟之)를 심복으로 여겨 무슨 일이든 그의 판단과 감수를 받고서야 글로 썼다. 당시 사람들이 "염린지의 입에 배광정의 손"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는 염린지에게서 나왔고 이를 구체화한 것은 배광정이라는 뜻이었다. 둘이 합쳐 하나가 되자 최고의 조합을 이루었다.
진(晉)나라 때 태숙(太叔) 광(廣)은 변론에 능했고 지우(摯虞)는 글쓰기가 뛰어났다. 조정에서 공론을 펼칠 때 광이 말솜씨를 뽐내며 주장을 세우면 지우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하지만 물러나와서는 글을 지어 광을 비난했다. 그러면 그 글에 대해 광은 또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상대를 헐뜯느라 조용할 날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문해피사(文海披沙)'에 나온다.
김육(金堉·1580~1658)이 만년에 사치하여 생일이 아닌데도 큰 잔치를 벌였다. 사돈인 신익성(申翊聖·1588~1644)이 잔치가 파하기를 기다려 기와 술통에 보리술을 채우고 버들고리에 삶은 개를 담아 종을 시켜 보냈다. 김육이 내당에 들어가 자녀를 다 모아놓고 며느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은 네 아비가 보낸 것이다. 옛날 내가 빈천하여 시골에 묻혀 지낼 때는 보리술 한 잔과 삶은 개 다리 하나도 먹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내가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처음부터 부귀했던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 이제 이렇게 보내온 음식을 보니 옛 벗이 나를 권면하고 경계하는 뜻이로구나." 그러고 나서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보내온 보리술과 개고기를 먹고 자리를 파했다. 잘못을 은근히 꾸짖은 신익성의 강직함과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김육의 도량을 당시에 양미(兩美)로 일컬었다. '송천필담 '에 나온다.
사람의 능력은 저마다 다르다. 둘이 환상적 조합을 이뤄 부족한 점을 보태 시너지를 내면 함께 아름다운 쌍미(雙美)가 되고, 따로 놀며 비난만 하면 같이 망하는 양상(兩傷)이 된다. 저마다 잘났다고 으르렁대니 될 일도 안 되고, 부족함을 서로 붙들어 뜻을 모으자 안 될 일도 문제없이 해결된다. 되는 나라와 안 되는 집안의 차이가 여기서 엇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