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양화(陽貨)'편에 '자주색이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고, 정나라의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뒤엎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고 했다. 잡색인 자주색이 원색인 붉은색의 자리를 차지했다. 정나라의 자극적인 음악이 유행하자 정격의 아악은 퇴물 취급을 받는다. 더 큰 문제는 번드르르한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최근 한국 가톨릭 교회의 창설 주역 이벽(李檗·1754~1785)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성교요지(聖敎要旨)'를 둘러싼 논란이 시끄럽다. 김양선 목사가 1930년대에 '만천유고(蔓川遺藁)' 등 여러 초기 천주교 서적을 구입해 1960년대에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기증했다. 여기 실린 '성교요지'는 시경체의 4언 한시로 천주교 교리의 핵심을 설명한 내용이다. 이 책으로 이제껏 박사만 여럿 나왔다.
하지만 책 속의 성경 용어가 19세기 말 이후 기독교에서 쓰던 표현투성이여서 위작설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최근 장신대 김현우·김석주 두 분이 '성교요지'가 1897년 미국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지은 '쌍천자문(雙千字文)'과 본문은 물론 주석까지 똑같다는 사실을 밝혔다. '성교요지'는 이름만 바꿔치기한 가짜였다. '만천유고'에 실린 이승훈의 시집 '만천시고'도 전부 가짜였다. 필자가 확인해 보니 이벽이 죽고 15년 뒤에 태어난 양헌수 장군의 시가 무려 30여 수나 절취되어 끼어들어 있었다.
자주색이 붉은색의 자리를 차지하고, 가짜가 진짜를 내몰았다. 그간의 공부와 노력이 허망하고 허탈하다. 이제라도 사실을 깨끗이 인정하면 그만일 일인데, 슬그머니 윌리엄 마틴 선교사가 이벽의 글을 베낀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끝까지 우겨보자는 심산이다. 로마 교황청에서 이벽과 이승훈에 대한 시성시복(諡聖諡福)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인데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릴 셈이냐고 한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포박자(抱朴子)'는 '진실과 허위가 뒤바뀌고 보옥과 돌멩이가 뒤섞인다. 그래서 이 때문에 슬퍼한다(眞僞顚倒, 玉石混淆, 故是以悲)'고 했다. 나도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