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0〉 인민복 입고 제3야전군 사병들과 함께 춤추는 우이팡. 1949년 5월 초, 진링여자대학 체육관. [사진 김명호] 진링여자대학의 시설과 교육환경은 당대 최고였다. 교장 우이팡(吳貽芳·오이방)은 하나를 더했다. 당시 국립 진링대학에는 잘생긴 남학생들이 많았다. 진링여대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명승지 쉬안우후(玄武湖) 인근은 해만 지면 진링여대와 진링대학 학생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불온 학생’ 체포하러온 경찰에 진링여대는 밤 9시만 되면 기숙사문을 닫았다. 우이팡은 새벽에 학교를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루는 기숙사 창문 앞에 의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졸업생이 구술을 남겼다. “교장은 늦게 돌아온 학생이 의자에 올라가 창문을 넘어 숙소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교내에 연인실(戀人室)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금하는 것이 소통만 못하다는 말에 다들 동의했다. 기숙사 1층 휴게실에 탁자와 의자를 갖춘 작은 방들이 들어섰다. 밤 9시 전까지 학생들은 그 안에서 연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요구 사항도 있었다. “먹고 난 사탕봉지와 과일 껍질은 남학생이 들고 나가라.” 로칼(Local)이라는 용어가 교내에 유행했다. 러브콜(Love Call)의 약자였다. 누구의 연인이 나타나면 학생들은 친구 이름 부르며 “네 로칼이 왔다”고 수다를 떨었다. 진링여자대학의 연인실. 남학생들이 여자친구 만나러 왔을 때 한쪽 구석에서 교무주임이 어슬렁거리거나 신문 보는척하며 연인실을 감시했다. [사진 김명호] 1937년 7월 초,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저명 교수들을 뤼산(廬山)으로 초청했다.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했다. 전시에도 교육은 평소와 같아야 한다.” 황급히 난징(南京)으로 돌아온 우이팡은 교무위원회를 열었다. 대학을 쓰촨(四川)성 청두(成都)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12월 3일, 일본군이 수도 난징을 공격하기 직전, 우이팡은 학생들과 영국 상선에 올랐다. 40여일간 영국 군함에 바짝 붙어가며 일본의 공습을 피했다. 청두에 도착한 우이팡은 현지 대학과 연합했다. 난징의 유서깊은 유원지 쉬안우후 주변은 젊은 남녀들의 좋은 휴식처였다. 1930년대의 쉬안우후 정경. [사진 김명호] 우이팡은 국민당의 부패와 무능에 염증을 느꼈다. 장제스 하야 후 교육부장 맡아 달라는 대리총통 리쭝런(李宗仁·이종인)의 제의를 거절했다. 함께 대만으로 가자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1949년 4월 말, 난징에 입성한 중국인민해방군 제3야전군 대표가 우이팡에게 정치협상회의 참여를 청했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간 가와시마 요시코의 죽음, 아직도 역사 속 비밀로… (0) | 2020.09.05 |
---|---|
천자껑 “왜구와 평화 논하는 공직자·군인, 국가 해치는 한간” (0) | 2020.08.29 |
우이팡 “난세 여성, 조국과 후세 영광 위해” 중국어 취임사 (0) | 2020.08.22 |
장제스 교육주권 선언…35세에 모교 교장 된 우이팡 (0) | 2020.08.08 |
저우언라이 “우이팡은 모든 면에서 쑹메이링을 능가했다” (0) | 20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