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9〉 우이팡(둘째 줄 오른쪽 첫째)은 현안에 관한 회의를 자주 열었다. 1933년 일본군이 화베이(華北)를 점령하자 ‘국제문제토론회’를 열었다. [사진 김명호] 개혁과 혁명은 혼란의 시작이지 마무리가 아니었다. 19세기 중후반 개혁과 혁명 바람이 불면서 중국은 조용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어느 구석에서건 총질이 벌어졌다. 유서 깊은 골목에서 몽둥이가 춤을 추고, 일하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 사람의 비판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나지막하지만 힘 실린 목소리 엉망이긴 교육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에서 유입된 선교사들은 도처에 학교를 세웠다. 숫자 파악이 힘들 정도로 난립했다. 학생들도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가출한 여인이나, 눈 맞은 형수와 야밤에 고향 등진 시동생 등 각양각색이었다. 교사도 엉터리들이 많았다. 교내에서 별 해괴망측한 일이 다 벌어졌다. 그래도 다른 분야에 비하면 일찍 제자리를 찾았다. 우이팡은 매일 새벽 교내를 산책했다. 학생이 뒷모습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개교 이래 진링여대는 모든 강의를 영어로 했다. 교장의 훈시도 마찬가지였다. 2대 교장 우이팡(吳貽芳·오이방)의 취임식도 내빈들의 영어 축사가 줄을 이었다. 단상에 오른 우이팡은 중국어로 짧은 취임사를 했다. “진링여대는 중국인의 대학이다. 본교의 설립 목적은 신하이(辛亥)혁명 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여성지도자 양성이다. 중국의 지도자는 국학과 과학을 겸비해야 한다. 현재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은 소수다. 여성교육의 목적은 책임감과 고결한 인품의 지도자 배양이다. 중국은 혼란기다. 우리는 모두 난세의 여자들이다. 포기하지 말고, 조국과 후세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자.” 영국 출장 중 올림픽 여자대표팀 임원으로 참가한 진링여대체육과 교수(앞줄 왼쪽 첫째와 셋째)를 격려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우이팡(앞줄 왼쪽 둘째). 1936년 8월 7일, 베를린올림픽 선수촌. [사진 김명호] “젊은 시절 현재 국민당 고관이 보낸 구애 편지를 받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인간 세상의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수없이 겪었다. 진심인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답장을 안 했다. 두 번째 편지 받고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세 번째 편지 기다리던 중 그 사람이 미국유학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번 간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30이 훌쩍 넘어버렸다. 그 사람의 결혼 소식 듣고 충격받았다. 학업과 교육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고관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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