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우이팡 “난세 여성, 조국과 후세 영광 위해” 중국어 취임사

bindol 2020. 8. 22. 05:06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9〉

우이팡(둘째 줄 오른쪽 첫째)은 현안에 관한 회의를 자주 열었다. 1933년 일본군이 화베이(華北)를 점령하자 ‘국제문제토론회’를 열었다. [사진 김명호]

개혁과 혁명은 혼란의 시작이지 마무리가 아니었다. 19세기 중후반 개혁과 혁명 바람이 불면서 중국은 조용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어느 구석에서건 총질이 벌어졌다. 유서 깊은 골목에서 몽둥이가 춤을 추고, 일하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 사람의 비판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나지막하지만 힘 실린 목소리
붓처럼 곧은 자세에 학생들 환호

구애하던 국민당 고관 결혼 소식에
충격 받은 우이팡, 교육에 전념

전란·자연재해 잦은 시대 맞춰
‘후생’을 교훈 삼아 23년간 재직

엉망이긴 교육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에서 유입된 선교사들은 도처에 학교를 세웠다. 숫자 파악이 힘들 정도로 난립했다. 학생들도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가출한 여인이나, 눈 맞은 형수와 야밤에 고향 등진 시동생 등 각양각색이었다. 교사도 엉터리들이 많았다. 교내에서 별 해괴망측한 일이 다 벌어졌다. 그래도 다른 분야에 비하면 일찍 제자리를 찾았다.

1910년대에 들어서자 제대로 된 고등교육기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징(南京)의 진링여자대학(金陵女子大學)은 여선교사들이 세운 모범적인 대학이었다. 설립도 빨랐다. 1919년 지금의 베이징대학 자리에 미국인이 세운 옌칭(燕京)대학보다 4년 먼저였다.

진링여대, 영어 축사·강의가 관행

우이팡은 매일 새벽 교내를 산책했다. 학생이 뒷모습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개교 이래 진링여대는 모든 강의를 영어로 했다. 교장의 훈시도 마찬가지였다. 2대 교장 우이팡(吳貽芳·오이방)의 취임식도 내빈들의 영어 축사가 줄을 이었다. 단상에 오른 우이팡은 중국어로 짧은 취임사를 했다. “진링여대는 중국인의 대학이다. 본교의 설립 목적은 신하이(辛亥)혁명 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여성지도자 양성이다. 중국의 지도자는 국학과 과학을 겸비해야 한다. 현재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은 소수다. 여성교육의 목적은 책임감과 고결한 인품의 지도자 배양이다. 중국은 혼란기다. 우리는 모두 난세의 여자들이다. 포기하지 말고, 조국과 후세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자.”

영어 연설만 듣던 학생들은 젊고 예쁜 교장의 중국어 취임사에 환호했다. 졸업생의 회고를 소개한다. “꼿꼿한 자세가 붓 같았다. 조용한 음성에 힘이 있었다. 흑색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단정한 걸음, 졸업하는 날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른 새벽 교내 산책하는 뒷모습은 같은 여자 눈에도 고결해 보였다. 항상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중공 원로 둥비우(董必武·동필무)가 중국 남자 중에는 우이팡 같은 인물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들었다. 맞는 말이다.”

진링여대는 1951년 가을 미국의 지원동결로 국립진링대학과 합병할 때까지 36년간 존속했다. 1928년 교장에 취임한 우이팡은 23년간 진링여대를 이끌었다. 우이팡의 재직 기간은 평범한 시절이 아니었다. 전란이 빈번하고 자연재해가 그치지 않았다. 우이팡은 후생(厚生)을 교훈으로 내 걸었다. 학기 초마다 학생들에게 후생을 강조했다. “인생의 목적은 후생이다. 후생은 자신을 빛내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타인을 돕고 사회를 복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후생이다. 우리 대학의 창학(創學) 종지(宗旨)는 개인의 사리(私利)를 도모하지 않는 고상한 인격체의 양성이다. 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책임감이 약하고 게으르다. 재학 기간 서로 돕고 협력해서 사회에 봉사할 준비를 하도록 하자. 그것이 애국주의의 출발이다.”

우이팡은 평생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집요하게 묻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연애 같지도 않은 연애를 한 번, 그것도 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우이팡 연애사 들은 장제스 폭소 터뜨려

영국 출장 중 올림픽 여자대표팀 임원으로 참가한 진링여대체육과 교수(앞줄 왼쪽 첫째와 셋째)를 격려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우이팡(앞줄 왼쪽 둘째). 1936년 8월 7일, 베를린올림픽 선수촌. [사진 김명호]

“젊은 시절 현재 국민당 고관이 보낸 구애 편지를 받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인간 세상의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수없이 겪었다. 진심인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답장을 안 했다. 두 번째 편지 받고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세 번째 편지 기다리던 중 그 사람이 미국유학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번 간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30이 훌쩍 넘어버렸다. 그 사람의 결혼 소식 듣고 충격받았다. 학업과 교육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고관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쑹메이링은 누군지 짐작이 갔다. 우이팡에게 들은 말을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그대로 해줬다. 남녀문제에 정통한 장제스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한동안 멍한 표정 짓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쑹메이링에게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우이팡 만나면 말조심해라.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라.” 이튿날 외교부장을 불렀다. “편지 한 통이 네 운명을 갈랐다. 한 통 더 보냈으면 평생 큰 고생할 뻔했다. 네가 연애편지 두 번으로 그친 덕에 중국은 위대한 교육자 한 명을 얻었다. 앞으로 우이팡에게 잘해라.” 외교부장은 웃기만 했다. 쑹메이링과 외교부장은 우이팡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진링여대의 교세 확장에도 신경을 썼다. 중국풍의 강의동, 도서관, 기숙사, 강당, 부속중학, 체육관 신축과 베를린 올림픽 참관인 파견에 한몫했다.

교장 우이팡은 젊은 시절의 고지식한 우이팡이 아니었다. 하루는 새벽 산책 도중 기숙사 담에 책상이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짚이는 바가 있었다. 21세기인 지금 했어도 화제를 몰고 올, 기상천외한 지시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