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모란의 지조[이준식의 한시 한 수]〈52〉

bindol 2020. 9. 2. 09:20

(납일선조행상원·臘日宣詔幸上苑) /
武則天(연말에 상원 행차를 명하다)

 

明朝遊上苑 명조유상원
火急報春知 화급보춘지
花須連夜發 화수연야발
莫待曜風吹 막대요풍취

 

내일 아침 정원으로 나들이 갈 참이니
서둘러 봄에게 알리도록 하라
꽃들은 밤새워서라도 다 피어 있으라
새벽바람 불기를 기다리지 말고

 

花王의 영예를 가진 모란은 부귀영화의 상징이자 지조,
절개의 표상이기도 하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이 지은 이 시에는
전설 같은 후일담이 뒤따른다.

어느 엄동설한, 여황제가 문득 황실 정원의 꽃을 완상(즐겨 구경하다)하고
싶다고 하자 한 신하가 아첨을 떨었다.

내일 아침 모든 꽃이 만발하도록 폐하께서 성지를 내리시지요.
측천은 5언시로 된 이 조서를 발했다.

꽃의 요정들은 이 조서를 보자 화들짝 놀라
밤새 바지런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다음 날 아침 황제가 정원으로 나와 보니
과연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한데 유독 모란만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꽃망울을 내밀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의 명령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오연(傲然)한 지조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황제는
모란을 뿌리째 뽑아 불에 태우라고 명령했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아예 모란을
수도 장안에서 멀리 洛陽으로 내쳐버렸다.

황당해 보일지라도 전설의 발원에는 한 가닥 모티프가 내재하고 있을 터,
그것은 한 여장부의 비범한 자신감일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일개 궁녀의 신분으로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어 일약 황제로까지 등극했던 그 자신감 말이다.

그 후 낙양은 모란의 번성지가 되어 각종 진귀한 품종이 생겨났고,
오늘까지도 낙양의 봄날 공원에는 ‘낙양홍(洛陽紅)’이라는
이름으로 모란이 한껏 기세를 떨치고 있다.
 

-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