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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칼럼니스트의 눈] 국민이 권력자의 종 될 뻔한 걸 감사원이 막았다[출처: 중앙일보]

bindol 2020. 11. 3. 05:22

‘최재형 감사보고서’는 탈원전 고발장

그래픽=최종윤

2020년 10월 20일 ‘월성1호기 조기폐쇄 결정의 타당성 점검’이란 부제가 달린 감사원(원장 최재형·사진 오른쪽)의 감사보고서가 발표되었다. 200페이지짜리 정부 문서다. 일견 지루한 공문서에 불과하지만 초반 20여 쪽만 참고 읽어나가면 곧바로 으스스한 공무원 범죄 영화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넘치는 긴장과 서스펜스, 지루할 틈이 없다. 독자는 감사원 홈페이지에서 이 보고서를 만날 수 있다. 주요 사건들의 시간적 배경은 2018년 봄에서 2019년 겨울까지. 공간적 배경은 서울의 청와대와 세종시의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경주에 본부를 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등 세 곳이다.

대통령 한 마디에 즉각 가동 중지
월성1호와 백운규, 채희봉, 문신학
정권 바뀌면 밝혀질 공무원 범죄
보고서 “정부가 원하는대로 작업”

주인공은 문재인 대통령과 사건 당시 직책 기준으로 청와대의 A보좌관, 채희봉 산업정책 비서관, 산업부의 백운규 장관, 문신학 원전산업정책관, 정종영 원전산업정책과장, B사무관, 한수원의 정재훈 사장 등 10여명이다. 월성1호기 조기폐쇄의 경제성을 평가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삼덕회계법인도 무대에 오른다. 이들은 ‘판도라’ 같은 픽션 재난 영화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이 아니다. 국회가 2019년 10월 고발하고 감사원이 1년간 조사해 밝혀낸 실제 상황 속의 인물이다. 감사보고서의 결말은 ‘공무원 2명에게 징계 요구’라는 용두사미 같은 모양새였다. 용두사미는 최재형 감사원장을 포함해 6명의 감사위원이 3대 3으로 갈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지 등장인물들을 법정에 소환해 죄를 물을 수 있는 수준의 사실적 증거와 진술들은 확보됐다. 그런 면에서 최재형의 감사보고서는 선행적 고발장, 지옥의 묵시록이라고 부를 만하다.

10.20 감사보고서는 공무원의 거짓과 은폐, 조작의 기록이다. 그 보고서엔 월성1호기라는 법령에 따라 운전되던 수조 원짜리 거대 원자력 발전기를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두 달 만에 즉시 가동정지시키기 위하여 이뤄진 거짓과 은폐, 조작의 행적들이 모아져 있다. 그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랐다’ ‘국가의 정책이었다’라며 범죄적 혐의를 변명하려 들지만 명령이든 정책이든 법과 절차를 지키지 않은 죄는 심각한 것이다. 감사원은 문제적 인물들이 절차적 정의, 절차적 합리성을 지키지 않은 점을 구체적으로 적시함으로써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법치사회의 정의론을 굳건히 했다.

최재형의 감사원마저 정책 수행 과정에서 대통령의 공약이라는 이유로 적법 절차를 무시하기 일쑤인 공무원들을 감싸 안았다면 이 나라는 인치(人治)의 사회가 되어버릴 뻔했다. 실제로 성윤모 현 장관의 산업부는 감사원 조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기폐쇄 조치와 관련된 444개의 파일을 한밤중에 삭제해 징계 주문이 내려온 두 공무원을 두둔했다. 적극 행정이었는데 왜 면책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느냐고 오히려 감사원에 대들었다. 하지만 무슨 적극 행정을 밤 12시 전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하나. 편의적인 말장난으로 국민 앞에 뻔뻔한 죄를 더 짓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헌법 질서와 관습상 대통령 직속 독립 행정기관인 데다 수장이 부총리급인 감사원에 일개 정부 부처가 맞서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산업부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인치가 횡행하면 필연코 자의(恣意)가 판치는 곳 즉, 힘 있는 자가 제멋대로 기준 없이 세상을 다스리는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 나라에서 국민이 주권자의 위치에서 밀려나 권력자의 종의 신세로 떨어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B사무관을 포함한 행정고시 출신의 엘리트 관료들은 444개 문서를 무단 삭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언행에서 죄의식을 감지할 수 없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컴퓨터 파일을 직접 삭제한 공무원은 “내일 감사원에 가야 하는데 감사관이 관련 자료를 요청할 때 있는데도 없다고 말씀을 드리면 켕길 수 있을 것(양심에 가책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관련 자료가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 문서 폴더를 야밤에 삭제한 것”이라는 취지의 답변을 하였다. 증거가 없다는 거짓말이 양심에 가책이 될까 봐 증거 자체를 없애 버렸다는 얘기다. 아이를 납치해 놓고 유괴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이 양심에 가책이 될까 봐 아예 살해했다는 어법이다.

한편 이 공무원한테 자료 삭제를 지시한 상급 공무원은 2019년 11월경엔 “월성1호기 조기폐쇄를 추진하면서 대통령 비서실과 백운규 산업부 장관에게 보고한 자료들이 감사원에 제출되면 잘못 등이 밝혀질 것을 우려하여”라며 삭제 지시의 동기를 진술해 놓고, 막상 이 사실이 문제 될 듯하니까 2020년 9월엔 “삭제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을 번복하였다는 내용이 감사보고서에 들어 있다. 상부의 명령을 따랐던 하급 공무원은 결정적 순간에 발뺌해 자기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상급자한테 배신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상부 명령이라도 불법적인 지시는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자명한 행동 준칙은 독일 나치 시대의 대량학살 범죄를 재판하면서 문명 세계가 확립한 보편적 도덕률이다.

2018년 6월에 이루어진 월성1호기의 ‘즉시 가동중지’ 조치는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공약으로 천명했다는 점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적법 절차와 조건 충족이라는 면에서 폭력적일 정도로 성급하고 무리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 시점은 경제성 등을 평가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고, 경제성 평가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외부 전문기관에 의해 선행되어야 하며, 산업부 장관은 한수원 등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적절히 수렴하고, 즉시 가동중단 방침과 같은 중요한 행정지도는 구두가 아닌 공문 형식으로 투명하게 했어야 했다.

우선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의 A보좌관이 월성1호기를 방문하고 돌아와 “외벽에 철근이 노출되었다”는 보고를 하자 대뜸 “월성1호기 영구 가동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지”를 질문하였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채희봉 산업비서관은 행정관을 통해 산업부에 관련 보고서를 작성토록 요구했고, 산업부 해당 부서의 과장은 백운규 장관에게 “외부 전문기관에 의한 경제성 평가가 아직 착수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일정 시기까지 계속 가동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취지의 보고를 했다.

그러나 백운규 장관은 이를 질책하며 “한수원 이사회의 조기폐쇄 결정과 함께 즉시 가동 중단하는 것으로 재검토하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백 장관의 지시는 결론을 도출하기 전에 경제성 평가 등 선행 절차를 거치도록 되어 있는 법령을 무시한 것이다. 감사원은 산업부 장관이 사실상 한 가지(즉시 가동중지) 결론만 내놓으라고 함으로써 관련 부서와 한수원, 삼덕회계법인으로 하여금 연쇄적으로 부담을 갖게 했다고 보았다. 최종적으로 경제성을 평가하는 삼덕회계법인은 입력 변수를 조정해 장관의 입맛에 맞게 ‘즉시 가동중지’ 결론을 제출하였다.

감사보고서엔 산업부와 한수원의 압박으로 전문적인 외부 기관으로서 공정하고 중립적이며 객관적으로 경제성 평가를 수행하지 못한 삼덕회계법인 Y씨의 회한이 독백처럼 소개됐다. “처음에는 정확하고 합리적인 평가를 목적으로 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한수원과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맞추기 위한 작업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기분이 씁쓸합니다.” 감사보고서를 가만히 뜯어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정책은 거짓과 은폐, 조작 같은 공무원 범죄 위에서나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악의 평범성, 혹은 폭력적 권력을 죄의식 없이 휘두름

한나 아렌트(左), 예루살렘의 아이히만(右)

우리는 멀쩡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인치로 바뀌어 순식간에 전체주의로 둔갑한 역사를 알고 있다. 유대인 수백만 명을 살해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괴물 정부, 1933년에서 45년까지 히틀러 총통 시대의 독일이다. 나치당 정부의 관료들에겐 지도자의 방침을 이의 없이 따르는 충성만이 요구됐다. 지도자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당원과 공무원들이 행하는 거짓이나 은폐, 조작은 장려되었다.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들은 체계적으로 붕괴했다. 국민은 정치의 주체나 목적이 아니라 통치의 수단 혹은 도구였다. 기존의 법체계는 무효가 되고 ‘총통 각하’의 말이 법인 인치 국가가 탄생했다.

총통이 자살하고 패전한 뒤에도 대부분의 공직자와 국민들은 “이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지?”를 되뇌며 패닉에 빠졌다. 히틀러 통치 12년 만에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유 의지를 잃어버렸다. 자유 의지가 없으면 책임 능력도 없는가. 인종 대량학살 혐의로 전범 재판을 받은 나치 당원, 나치 정부의 공무원들은 한결같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국가의 정책을 수행했을 뿐”이라며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전체주의 독일에서 행해진 잔학한 범죄들은 모두 죽은 히틀러 한 사람의 책임으로 귀결될 터였다.

나치당의 전체주의에 맞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였던 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75)는 1963년에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사진)이란 책에서 이스라엘 법정에 끌려 나온 한 나치당 간부의 정신 구조를 해부했다. 아돌프 아이히만(1906~61)은 “나는 유대인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그들을 (죽음의 장소로) 이동시켰을 뿐”이라며 ‘살인죄 아님’을 주장했는데 그가 궤변을 지어내려 한 게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는 게 아렌트의 관찰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같은 정신 구조의 특성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권력 집단 속의 한 인간이 폭력적 권력을 휘두르면서 양심과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보았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처: 중앙일보]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눈] 국민이 권력자의 종 될 뻔한 걸 감사원이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