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字文 工夫

磻溪伊尹 佐時阿衡

bindol 2020. 11. 13. 15:34

磻溪伊尹 佐時阿衡

 

本文

磻溪伊尹 佐時阿衡 반계이윤 좌시아형

磻溪太公望莘野伊尹 재상

한 시대를 도왔으니 阿衡이라 불리었다.

 

訓音

물이름 반 시내 계 저 이 맏 윤

도울 좌 때 시 언덕 아 저울대 형

 

解說

지난 장에서는 국가에 공로를 세운 사람들은 그 공적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려고 공적비를 세워 공신들을 우대했던 사실을 공부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그런 공신들이 누가 있는가 구체적인 인물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반계이윤(磻溪伊尹) 磻溪太公望莘野伊尹 재상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은 석()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화살을 시위에 메기다'의 뜻입니다. '주살에 다는 돌'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살돌'을 뜻합니다. 이 때는 '''주살 돌 추 파'라 발음합니다. ''은 물이름 반, 강이름 반, 시내 반'이라 하는데, 이는 반계(磻溪)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반계(磻溪)는 위수(渭水)로 흘러 들어가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강으로, 옛날 강태공(姜太公)이 이곳에서 낚시질을 하던 곳입니다.

()는 수()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실이 이어지다'의 뜻입니다.

실이 이어지듯[] 계속 쏟아지는 물[]이란 뜻으로, '시냇물'의 뜻을 나타냅니다.

()는 인() + ()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다스리다'의 뜻이고, ()'사람'이란 뜻이니, 다스리는 사람의 뜻을 나타냅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인 '저 사람'''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상형자(象形字), 신성한 것을 손에 넣은 모양을 본떠, 씨족(氏族)의 장()의 뜻에서, '장관(長官)', '다스리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 () + (丿)의 지사자(指事字)로 보아, 어떤 일[丿]을 잡아 쥔 손[]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정사(政事)를 손아귀에 넣는다는 데서 '다스리다'란 뜻이 되었습니다.

반계이윤(磻溪伊尹). 이는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보필한 강태공(姜太公)과 탕왕(湯王)을 도와 은나라를 일으킨 명상(名相)인 이윤(伊尹)을 말합니다.

반계(磻溪)란 위수(渭水)로 흘러 들어가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강으로, 옛날 강태공(姜太公)이 이곳에서 낚시질을 하던 곳입니다. 그는 여기서 문왕(文王)을 만났으니 월척을 낚은 것이죠. 때문에 반계는 강태공(姜太公)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쓰입니다. 그래서 반계는 강태공의 별호(別號)가 되었습니다.

강태공(姜太公)이라 하면 흔히 낚시꾼을 이르는 말로 전용되었는데, 실제로 그는 낚시질을 하면서도 고기를 잡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낚시도구를 둘러매고 반계에 나아가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낚시에 미늘이 없는 민낚시였고, 그것도 수면 위로 세 치가 떠 있었으니, 그는 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은 것입니다.

 

태공망(太公望)

강태공(姜太公)은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후손으로, ()이 강씨(姜氏)이며 이름은 상()이고 자()는 자아(子牙)입니다. 또 그의 선조가 여()나라에 봉해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는 또 태공망(太公望)으로 불리는데 속칭 강태공(姜太公)으로 불립니다. 또 여망(呂望)이라도 합니다. 그는 동해(東海)에 살면서 가난했는데 학문에만 힘쓰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생몰연대는 잘 알 수 없다고 하나, 기원전 1211(은나라 경정(庚丁) 8~ 기원전 1072 주강왕 6)까지 139세를 살았다고도 하고, 혹은 기원전 1140 ~?까지 살았다고도 합니다. 혹은 160세를 살았다고도 하는 등 이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가려고 할 때, 점치는 일을 담당하는 태사 벼슬의 편[史編)이라는 사람이 점을 쳐서 점괘를 풀어내어 말했습니다.

"위수(渭水)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시면 장차 큰 것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요, 범도 아니고 큰곰도 아닙니다.

점에 나타난 징조로는 공후(公侯)를 얻을 조짐입니다.

이는 하늘이 임금의 스승을 보내어서 임금을 보좌하여 삼대가 지난 다음에까지 나라가 이어지도록 한 것입니다."

문왕이 말했습니다.

"점이 이처럼 좋은 징조를 나타낸다는 말인가?"

사편(史編)이 대답했습니다.

"저의 선조인 태사 주()가 순()임금을 위하여 점을 쳤을 때 고요(皐陶)라는 현인을 얻었는데, 그때의 점괘가 이 점과 비슷합니다."

문왕은 이에 삼일간 목욕재계하고 위수의 북쪽에서 사냥을 했습니다. 과연 점괘대로 띠풀 위에 앉아서 빈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여상(呂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왕은 마차에서 내려 먼저 인사를 건네고 물었습니다.

"고기가 잘 뭅니까?"

그러자 여상이 말했습니다.

"물기는 잘 하는데 잡히지는 않습니다."

이에 문왕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말했습니다.

"본래 우리 선대의 태공(太公) 고공단보(古公亶父 文王의 조부)께서 이르시기를. '장차 성인(聖人)이 주()에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로 인하여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생이 진정 그 분이 아닙니까?

나의 태공(太公 古公亶父)께서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 되었습니다(吾太公望子久矣)." 그리하여 그를 마차에 태우고 돌아와 높이 받들어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며 스승으로서 삼고 국정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 뒤, 문왕의 뒤를 이은 주무왕(周武王)은 그를 사상부(師尙父)로 모셨습니다.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은 주무왕(周武王)을 도와 은()나라)의 주()를 토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후에 제() 땅을 봉읍지로 책봉받아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강태공과 관계된 고사(故事)가 있어 전하고 있습니다.

강태공이 제()나라의 제후에 봉해져 가는 길에 한 노파를 만났습니다. 사실 강태공 여상은 문왕을 만나기 전까지는 끼니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열 살 연하의 마씨(馬氏)와 결혼은 했지만 허구한 날 집에 틀어박혀 서책과 씨름하면서 세월을 보낼 뿐 살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마씨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아내 마씨는 먹을 것이 없어 가을철 들에 가서 논둑 밭둑에 있는 피를 훑어서 말려 그것을 빻아서 먹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피를 훑어서 마당에 멍석을 펴고 피를 널어놓고 다시 들에 갔다오는 사이에 그만 소낙비가 와서 멍석에 널어놓은 피를 다 쓸어가 버렸습니다. 집에 있던 여상은 책만 볼 뿐 비가 내리든 말든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들에 나간 마씨는 비가 오자 멍석에 널어놓은 피가 생각이 나서 급히 집으로 왔지만 이미 멍석의 피는 빗물에 다 떠내려 가고 말았습니다. 마씨는 손이 부르트도록 훑어온 피가 빗물에 다 떠내려 갔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과 살다가는 굶어 죽겠다며 그만 보따리를 싸고 떠나게 해 달라고 하고는 집을 떠났습니다.

그 후 혼자가 된 여상은 위수 가에 나아가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다가 나이 80세쯤 되었을 때 문왕을 만나 입신양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여상이 제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태공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울고 있는가?"

그러자 마씨는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 남편이 강자아(姜子牙)입니다. 그때는 너무나도 가난하여 떠났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강태공은 전에 자신을 하직하고 떠난 마씨(馬氏)임을 알고 말했습니다.

"한 동이의 물을 떠 오시오."

마씨가 물을 떠오니 그것을 땅에 쏟은 다음 다시 그릇에 담아 보라고 하였다. 마씨는 담으려 하였으나 담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태공이 말했습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覆水不返盆]

한번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오. 한번 헤어진 후 다시 결합함은 그 같이 어려운 법이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은 이처럼 한번 헤어진 부부는 재결합할 수 없다는 뜻이며, 또한 어떤 일이든 한번 저지른 일은 다시 원상복구할 수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태공이 이같이 말하고 고각(鼓角)을 울리며 떠나가자 마씨는 부끄러워 길가에서 죽었다고 니다.

이 대목을 읽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태공이 마음이 좀 더 넓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생시킨 것은 생각치 않고 떠난 것만 괘씸하게 생각한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앞날을 예견하지 못한 마씨부인이 안타깝지만 만난신고를 겪으며 뒷바라지를 해준 정리를 생각해서 살 길을 열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_()_

이윤(伊尹)

이윤(伊尹)은 누구인가 알아보겠습니다.

이윤(伊尹)은 하()나라 말기 폭군 걸왕(傑王)이 폭정(暴政)을 행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상()의 탕왕(湯王)을 도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건립하는데 공을 세운 명재상입니다. 이윤(伊尹)은 원래 사람이름이 아니고, 이수(伊水 하남성(河南省) 이천현(伊川縣)의 강가에서 태어났고 탕왕을 도와 우상(右相. )이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윤(伊尹)은 이름을 지()라고 하는데 원래는 탕왕의 장인인 유신씨(有莘氏) 집안의 노예였습니다. 이윤은 노예의 신분으로써 유신씨국에서 비록 논과 밭에서 일은 하고 있었지만 나라 형세의 변화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황음무도(荒淫無道)하고 포학(暴虐)한 정치를 하고 있는 하나라 걸왕(傑王)을 뒤집어 엎어 버린 후에 제후가 한 번 되어 보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유신씨는 딸을 상()의 탕왕에게 시집보낼 때 이윤을 혼수품의 하나인 몸종으로 딸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윤은 요리를 잘하여 상에 온 후에는 탕을 위해서 주방장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는 상의 탕왕이 덕망과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음식을 탕에게 드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 형세를 분석하여 주었고, 하의 걸왕의 폭정에 대해서 여러 번 말하고 하를 멸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진언드리자 탕왕은 그 뜻이 합치함을 느끼고 그를 신임하여 노예신분을 해방시켜 주고 즉시 우상(右相)인 윤()에 임명하였습니다.

이것이 탕왕이 신야(莘野)에서 이윤을 맞이했다(殷湯 聘伊尹于莘野也)라는 내용입니다.

이윤은 탕왕을 도와 하()나라를 침공할 수 있는 책략을 세우고 결국에는 일거에 무도한 걸왕을 도모하여 하왕조를 무너뜨려 상왕조를 건립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라는 은()나라라고도 합니다. 상의 건국 초기에 이윤은 탕왕이 각종 전장 제도(典章制度)를 제정하는 것을 도와 왕조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리하여 정치는 안정되고 경제 역시 번영하였습니다.

탕왕에게는 삼자(三子)가 있었는데, 곧 태정(太丁), 외병(外丙), 중임(中壬)입니다. 탕왕(湯王)이 승하하자, 태자 태정(太丁)이 요절하여 둘째 외병(外丙)이 왕위를 올랐는데 이를 애왕(哀王)이라 합니다. 그는 수도를 박()으로 정했으나 제위를 2년도 넘기지 못하고 승하했습니다. 그래서 셋째 중임(中壬)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를 의왕(懿王)이라 합니다. 그도 4년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하였습니다. 이에 이윤이 주동이 되어 탕왕의 손자요 태정(太丁)의 장자인 태갑(太甲)이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를 문왕(文王)이라 합니다.

그런데 태갑은 성격이 포악하여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이 문란하였습니다. 무도한 왕에게 이윤은 죽기를 각오하고 잘못을 간하였습니다. 또한 잘못을 타이르는 글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크게 실망했지만 계속해서 간하고 글을 올렸습니다.

서경(書經)》『상서(商書)』「태갑 상(太甲上)에 이윤이 올린 글이 있습니다.

"선왕(先王. 탕왕)께서는 하늘의 밝은 명()을 살피시어 천지신명을 받드셨으며, 토신(土神)과 곡신(穀神), 그리고 종묘(宗廟)를 세워 공경치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하늘은 그 분의 덕을 굽어보시고 대명(大命)을 내려 만방(萬方)을 무마하여 모두 편안하도록 하셨으며, 이윤은 몸소 그분을 도와 백성들을 안정시켰습니다.

따라서 사왕(嗣王. 태갑)은 이룩된 유업을 삼가 계승케 된 것입니다.

이윤은 친히 서쪽에 도읍을 세운 하()나라를 가보았는데,

군주는 군주로서 일을 다하고 재상도 재상으로서의 일을 모두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후 뒤를 이은 왕이 임금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자 재상들도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하더이다. 사왕께서도 이를 경계하시어 삼가 덕을 받드십시오.

왕께서 덕을 받들지 않으면 조부(조부. 탕왕)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윤은 "왕이 깨닫지 못한다면 신()은 선왕의 명을 받아 뒤에 오는 왕에게 잘못이 없도록 부탁을 받았으니 도에 어긋난 행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며, 태갑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하는 수 없이 선왕의 묘와 가까운 곳에 동궁(桐宮)을 지어 그곳에 머물게 하고는 3년간 섭정을 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탕왕의 무덤을 매일같이 봄으로써 탕왕의 교훈을 되새겨 반성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은 별궁에서 3년 동안 외롭게 지내며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자 정권을 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나라를 잘 다스려 이윤이 태갑의 공정을 칭송하는 태갑훈 3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윤은 정치, 군사 뿐만 아니라 요리분야에서도 뛰어나 주성(廚聖) 또는 팽조지성(烹調之聖)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의학적으로는 여러 가지 약초를 물에 넣고 끓여 달이는 탕약(湯藥)을 처음 만든 탕제(湯劑)의 시조라고 합니다.

태갑이 재위 11년 만에 승하하자 그의 아들 옥정(沃丁)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를 소왕(昭王)이라 합니다. 옥정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에 명재상 이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81세라고도 하며, 100세라고도 합니다.

좌시아형(佐時阿衡) 한 시대를 도왔으니 아형(阿衡)이라 불리었다.

()는 인()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돕다'의 뜻입니다. 그런데 또 좌()'왼쪽'이란 뜻을 나타내기에 이를 구별하기 위해 '()'을 붙여, 사람[]이 서로 돕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돕다, 보좌하다, 보필하다'의 뜻으로 쓰입니다.

()는 일()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는 지()와 통하여 '가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진행해 가는[] [], ''의 뜻을 나타냅니다.

()는 부()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는 갈고리 모양으로 굽다의 뜻입니다. 언덕[]이 굽혀 들어간[] 곳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언덕, 모퉁이, 기슭'의 뜻을 나타내며, 파생하여 자기의 기분을 굽혀서 따르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첨하다, 아부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각() + ()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은 뿔을 본뜬 모양이고, ()는 소의 몸의 상형(象形)이고, ()은 네거리를 본뜬 모양입니다. 세로의 쇠뿔에 대하여, 가로 건넨 나무, 뿔나무의 뜻입니다. 소의 뿔이 사람 몸에 접촉됐을 때 받히지 않도록 고안한 것을 말합니다. ()하여 천칭(天秤)의 뜻도 나타냅니다.

좌시아형(佐時阿衡)이란 한 시대를 도왔으니 아형이라 불리었다는 말입니다.

좌시(佐時)'시세(時世)의 위급(危急)을 보좌(輔佐)하다'라는 뜻입니다. 위태로운 어떤 한 시대를 도왔다는 말입니다. 아형(阿衡)이란 상대(商代)의 벼슬이름입니다. 이 아형은 이윤의 이름이라고도 하며 이윤의 관명(官名)이라고도 합니다. 아형이 그의 관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아()는 의()를 뜻하고 형()은 평()의 뜻이라 했습니다. 즉 임금이 의지하여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였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형은 이윤의 관명이지만 이윤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윤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반계의 태공망도 겸하여 이른 말입니다.

이 천자문의 반계이윤(磻溪伊尹)은 시대순으로 보면 이윤반계(伊尹磻溪)라야 맞지만 운율상 앞뒤를 바꾼 것으로 보여집니다.

()나라의 걸왕(傑王)이 황음무도하고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할 때, 신야(莘野)의 이윤(伊尹)이 탕왕(湯王)을 도와 걸왕을 몰아내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건국하였고, (. )나라의 주왕(紂王)이 황음무도하고 포학하여 역시 백성들이 폭정 속에 시음하고 허덕일 때, 반계(磻溪)의 강태공(姜太公)이 문왕(文王)을 보필하고 무왕(武王)을 도와 폭

군 주왕을 몰아내고 주()나라를 건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했으니 이윤과 강태공은 한 시대를 구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들은 한 시대를 이끈 아형(阿衡)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천자문을 참 길었지요? 그래도 천자문을 통해 이윤과 강태공이란 인물에 대해서 대략적인 내용을 들려 드리고 싶어 길지만 적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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