桓公匡合 濟弱扶傾
【本文】
桓公匡合 濟弱扶傾 환공광합 제약부경
齊桓公은 천하를 바로잡고 糾合하여
약한 자와 기우는 자 구제하고 도왔도다.
【訓音】
桓 굳셀 환 公 공변 공 匡 바를 광 合 합할 합
濟 건널 제 弱 약할 약 扶 도울 부 傾 기울 경
【解說】
지난 장에서는 엄택곡부(奄宅曲阜) 미단숙영(微旦孰營)을 통해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은 제후국 중 가장 큰 노(魯)나라를 분봉(分封) 받아 곡부(曲阜)를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경영했습니다. 이것이 엄택곡부(奄宅曲阜)이며, 이런 큰 나라를 주공단(周公旦)이 아니면 어찌 경영하겠는가 하는 것이 미단숙영(微旦孰營)입니다. 그는 노나라의 제후로 임금이지만 중앙정부의 주나라에서는 천자를 보필하며 주나라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주공(周公)의 시대를 한참 지나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환공광합(桓公匡合) 제환공(齊桓公)은 천하(天下)를 바로잡고 규합(糾合)하여 이야기를 살피기 전에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을 알아보고 무슨 뜻인가 살펴보겠습니다.
환(桓)은 목(木) + 환(亘,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환()은 '두르다'의 뜻이니, 건물 네 구석에 둘러 세운 나무로, 역참(驛站)의 표지(標識)의 뜻을 나타냅니다. '원(?)과 통하여, '위엄 있다'의 뜻도 나타냅니다. 그래서, '굳세다, 표말, 이정표'의 의미로 쓰입니다.
공(公)은 지사자(指事字)로, 팔(八)은 '통로(通路)의 상형'이며, 구(口)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나타냅니다. 이는 제사를 지내는 광장의 뜻에서, 공공(公共)의 뜻을 나타냅니다.
광(匡)은 방(匚) + 왕ㆍ황(王, 㞷)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방(匚)은 '버들ㆍ대 따위를 구부려서 만든 상자의 상형이고, '왕ㆍ황(㞷)'은 '광(廣)'과 통하여 '넓다'의 뜻입니다. 속이 넓은 상자의 뜻입니다. 또 상자를 만들기 위하여 구부리거나 곧게 펴서 모양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바로잡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광(匡)은 '바로잡다, 바르다, 구원하다, 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합(合)은 집(亼) + 구(口)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집(亼)은 '뚜껑, 가리개의 상형(象形)'이고, 구(口)는 '그릇의 몸체의 상형'입니다. 그릇에 '뚜껑을 덮다, 합치다', 또 '뚜껑이 있는 합'의 뜻을 나타냅니다.
환공광합(桓公匡合). 환공(桓公)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오패(五覇) 중 한 명인 제환공(齊桓公)을 말합니다. 광합(匡合)에서 광(匡)은 정야(正也)라 했으니 '바로잡는 것'을 말하고. 합(合)은 '규합(糾合)'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광합(匡合)은 '바로잡고 규합했다'는 뜻입니다. 환공광합(桓公匡合)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천하를 바로잡고 제후(諸侯)들을 규합(糾合)했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천자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강태공(姜太公)과 주공(周公)의 보필을 받아 무도한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한 후 호경(鎬京)을 도읍지로 하여 명실공히 주(周)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이에 강태공과 주공은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의 기반을 확립하려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주공은 예악(禮樂)을 비롯한 법령을 제정하여 천하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습니다.
무왕(武王)의 뒤를 이은 주성왕(周成王), 주강왕(周康王)이 계속하여 왕위를 이으면서, 주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했는데, 이에는 주공(周公), 소공(召公), 필공(畢公), 사일(史佚) 등의 어진 신하가 있어 정사를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제10대 주여왕(周厲王)이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하고 제12대 주유왕(周幽王)은 천성이 난폭하고 황음무도하였는데 정인군자(正人君子)를 멀리하고 간특한 자를 중용하였을 뿐 아니라 이때 경국지색(傾國之色) 포사(褒姒)를 사랑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백복(伯服)이라 했습니다. 포사는 천하절색이었지만 성품이 곱지 않았는데 주유왕의 총애를 기화로 정비(正妃)인 신후(申后)를 몰아내고 왕후가 되었고, 정비의 소생인 태자 의구(宜臼)도 폐위시키고 자기의 소생으로 하여금 태자로 삼았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웃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웃지 않자 주유왕은 그녀를 웃게 하려고 악공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춤을 추게 했지만 포사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음악조차 좋아하지 않으니, 무엇을 좋아하느냐?" 하고 물어 보니, "첩은 좋아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지난날 손으로 비단을 찢어버렸을 때, 그 소리가 몹시 상쾌하더이다." 그러자 왕은 날마다 비단 100필씩을 들여오게 하고 근력 좋은 궁녀들에게 이를 찢게 하였으니 내궁에서 비단 찢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좋아하면서도 포사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유왕은 포사를 한 번 웃게 하는 자는 천금을 준다는 포고령까지 내리게 됩니다.
이때 아부하는 신하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계책을 마련하여 품하니 주유왕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내용인즉, 지난날 선왕이 서융(西戎)이 쳐들어오는 것을 염려하여 봉화대를 마련하여 오랑캐들이 쳐들어 오면 봉화불을 올리도록 하였는데 봉화가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태평시절이니 봉화를 올릴 일도 없으나 봉화를 올리면 제후들이 급히 달려올 것인데 적병들이 없는 것을 보면 제후들이 몹시 당황해 할 터이니 그 당황해 하는 모습을 포사가 본다면 웃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ㅠㅠ
이 어처구니없는 계책으로 봉화를 올리니, 기내(畿內)의 제후들이 봉화를 보고 당황하여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제후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주유왕은 누각에서 포사와 함께 질탕한 음악 속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왕이 "다행히 오랑캐들의 침입은 없다. 더 수고할 필요가 없으니 돌아가라." 하니 급히 달려온 제후들이 당황해 하고 황당해 하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포사가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포사가 웃자 왕은 "왕후가 한 번 웃으매 백 가지 아름다움이 일시에 생기는구나." 하며 계책을 낸 신하에게 천금을 주었다고 하니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후들을 희롱했으니...
신후(申后)가 정비에서 폐위되고 그의 아들이 태자에서 폐위된 사실을 안 신후(申后)의 아버지인 신(申)나라의 신후(申后)는 그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오히려 신후의 작위를 폐하고 군사를 보내 죄를 다스리려고 하자, 신후는 인접한 서융(西戎)과 합세하여 대군을 이끌고 호경으로 쳐들어 가게 됩니다. 이에 유왕이 긴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아무도 달려오는 제후가 없었습니다. 이때 제후들은 또다시 당하지 않으리라 하며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도 그 힘이 왕성해져서 중앙정부와 맞먹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유왕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어, 크게 패하여 무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태자 백복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후 포사는 융주(戎主) 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나라가 망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후로 주왕실은 그 힘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대저 하(夏)나라의 걸왕(傑王)은 말희(妺喜)를 사랑하다가 나라를 망쳤고,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를 총애하다가 나라를 망쳤던 것입니다.
주유왕(周幽王)이 죽자 폐위되었던 태자가 즉위하니 제13대 주평왕(周平王 B.C 770~720 재위)입니다. 그는 즉위하자 서울을 호경(鎬京)에서 동도(東都) 낙읍(洛邑 洛陽)으로 천도하
여 주왕실을 재건하엿습니다. 이렇게 하여 호경이 도읍이던 시대를 '서주(西周)'라 하고, 동도인 낙양(洛陽) 천도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시대는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춘추시대(春秋時代)란 기원전 770~453)까지의 역사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서주(西周)의 낙양 천도로 인해 동주(東周)시대가 이루어졌는데, 서주시대는 중앙정부인 주왕실은 절대권력의 존엄한 권위를 인정받아 봉건제후들이 천자(天子)를 존엄하게 받들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펴나갔습니다. 이에 반하여 동주시대가 도래하면서 주왕실의 천자는 존엄한 권위가 떨어지고 봉건 질서가 무너지면서 힘 있는 제후(諸侯)와 그들의 가신(家臣)인 경대부(卿大夫)들이 할거(割據)하여 상호 간의 세력 다툼과 영토확장에 매진하는 분열과 격동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다룬 역사서 《춘추(春秋)》라는 책에서 이 용어를 따 춘추시대(春秋時代)라 부릅니다. 춘추는 공자(孔子)의 저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설도 있습니다.)
춘추시대는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여 춘추시대에 제후 중에 세력이 강하여 패자(覇者)가 된 다섯 명의 회맹(會盟)의 맹주(盟主)를 말합니다. 이들은 주(周)왕실의 천자(天子)를 받들
고 오랑캐를 물리쳐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을 받들고 패자(覇者)를 자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패자로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晋)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이 있는데, 송양공(宋襄公)과 진목공(秦穆公)을 빼고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꼽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오패(五覇) 중 제환공(齊桓公)은 으뜸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천자문에서 제환공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제환공(齊桓公 B.C 685~643 재위)은 제(齊)나라의 15대 군주로 본명(本名)은 소백(小白)입니다. 그는 제희공(齊僖公 730~698)의 서자이며 제양공(齊襄公 697~686 재위)의 이복 동생입니다. 제양공이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에 의해 시해된 후 정적(政敵)인 공자 규(糾)를 제치고 즉위하여 43년 동안 재위하였습니다. 재위 기간 중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와 영척(寧戚) 등 현신들의 보필을 받아 내정(內政)와 외치(外治) 양면에서 혁혁한 성공을 거둬 제나라를 제일의 강대국으로 진흥시키고 천하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소집해 대규모의 회맹(會盟) 즉 국제회의를 열어 패자로 추대됨으로써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천자문의 환공광합(桓公匡合)은 아홉 차례나 있었던 대규모의 모임인 회맹(會盟)을 말합니다. 이 회맹은 제후국 간에 국방, 전쟁, 제후위(諸侯位) 계승 등 국가 명운을 좌우할 만한 중대 현안과 관련되어 체결하는 맹약(盟約)을 말합니다. 이때의 명분은 언제나 존왕양이(尊王攘夷)에 있었습니다. 환공은 이렇듯 아홉 차례나 천하의 제후들을 불러 모아 회맹을 가졌던 것입니다.
제약부경(濟弱扶傾) 약한 자와 기우는 자 구제하고 도왔도다.
제(濟)는 수(水) + 제(齊)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제(齊)는 '갖추어지다'의 뜻으로, '많은 것이 갖추어지다.'의 뜻입니다. '제(齊)'는 '진(進)'과 통하여, '나아가다'의 뜻으로, '강을 나아가다, 건너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파생하여, '빈곤과 장애를 건너 지나가게 하여 돕다'의 뜻도 나타냅니다.
약(弱)은 략 + 략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략은 또 궁(弓) + 삼(彡)으로 분석되는데, 궁(弓)은 휘는 활의 상형이고, 삼(彡)은 부드러운 털의 상형입니다. 이런 뜻이 합해져 '약하다, 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유연성이 풍부한 '20세'의 뜻을 나타냅니다.
부(扶)는 수(手) + 부(夫)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부(夫)는 '사나이'의 뜻입니다. 사나이[夫]가 손[手]을 뻗어 '돕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돕다, 붙들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경(傾)은 인(人) + 경(頃)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경(頃)은 '기울다'의 뜻입니다. 그런데 경(頃)이 '즈음'의 뜻으로 빌려 쓰이게 되자 '인(人)'을 덧붙여 '기울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제약부경(濟弱扶傾)은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우는 자를 붙잡아 주어 도왔다는 뜻입니다.
제약부경(濟弱扶傾)과 맥을 같이 하는 말 중에 계절존망(繼絶存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앞서 말한 존왕양이(尊王攘夷)와 더불어 춘추시대의 국제 질서를 확립하는 양대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작용했습니다. 춘추시대의 패자(覇者)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계절존망(繼絶存亡)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천자(天子)를 존경하고 사방의 이민족을 물리치며, 국통(國統)이 끊어진 나라의 종묘(宗廟)와 국통을 이어 주고 멸망한 소국(小國)들을 구원하여 복국(復國)시켜 줌으로써 천하의 안녕과 봉건제도 하에서의 강상(綱常)과 예악(禮樂)의 질서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던 것입니다.
어느 때, 북쪽 오랑캐라고 불리는 산융(山戎)이 융병(戎兵) 1만 기를 일으켜 연(燕)나라를 치니 연나라의 장공(莊公)은 제나라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제환공은 관중의 의견을 들어 연나라를 구하고자 군사를 내니 산융이 달아났는데 다시는 연나라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산융을 쳐 물리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은 땅을 연나라에 내어 주니 연나라는 감격하였고 이로 인해 연나라는 북방의 대국이 되었습니다.
또한 제환공은 기울어져 가는 노(魯)나라를 붙들어 준 일이 있었습니다. 노장공(魯莊公) 때의 일입니다. 그때 노장공의 서형(庶兄)인 공자 경보(慶父)와 서제(庶弟)인 숙아(叔牙)가 있었습니다. 친동생으로는 계우(季友)가 있었습니다. 계우는 어질었지만 경보와 숙아는 잔인하고 무덕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장공은 위의 세 사람에게 대부(大夫)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노장공 3년에 노장공은 맹임(孟任)이라는 여인과 눈이 맞아 아들을 낳고 이름을 반(般)이라 하고는 어머니 문강(文姜)에게 맹임을 부인으로 삼겠다고 하니 문강을 허락치 않고 친정 오라버니이며 동시에 정부(情夫)인 제양공(齊襄公)의 딸 애강(哀姜)과 약혼을 시켜버렸습니다. 이때 애강의 나이 겨우 한 살이었습니다. 애강이 스무 살이 되면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이리하여 노장공은 20년을 기다려 애강을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맹임은 울화병으로 죽게 됩니다. 애강이 오래도록 애를 낳지 못하자 애강의 친정 동생 숙강(叔姜)이 잉첩(媵妾)으로 와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계(啓)라 했습니다. 그런데 노장공은 애강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이란 것을 알고 속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애강은 서시숙(庶媤叔)인 공자 경보(慶父)에게 추파를 던져 간통하게 됩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경보는 동생 숙아를 포섭하여 자신이 임금이 되고 숙아를 재상이 되기를 은밀한 모의하게 됩니다.
노장공 32년에 노장공이 병이 들자 서제 숙아에게 일부러 후계를 물어보니 숙아는 공자 경보를 극구 칭찬하며 적임자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생 계우를 불러 후계를 물으니 맹임의 아들을 버리지 말라고 준절히 말했습니다. 노장공은 고개를 끄떡였으나 이내 말문이 막혔습니다. 사태가 긴박하게 흐르자 계우는 계교를 내어 숙아를 독살해 버립니다.
노장공이 죽자 공자 계우(季友)는 공자 반(般)을 주상(主喪)으로 삼고, 그 다음해 개원(改元)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공자 경보(慶父)는 어느 때 반(般)으로부터 매를 맞았던 장사 낙(犖)을 꼬드겨 노장공의 장자인 반(般)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애강(哀姜)의 친동생 숙강(叔姜)이 낳은 계(啓)를 군위(君位)에 앉히니 이가 바로 노민공(魯閔公)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권력은 공자 경보에게 돌아갔습니다. 어린 노민공은 경보의 억센 눈길과 애강의 싸늘한 눈초리가 무서워 외가인 제나라에 사람을 보내 힘을 빌리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제나라의 고락(姑落)이란 곳에서 제환공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어린 노민공은 은밀히 공자 경보가 딴 생각을 품고 있음을 고했습니다.
그리하여 제환공은 노민공을 돕고자 경보가 해치려 해 진나에 망명 중인 공자 계우(季友)를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고 또한 대부 공손추(公孫湫)를 보내어 경보의 동정까지 파악하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장차 위험 인물인 경보를 제거할 명분을 찾고자 했습니다. 경보는 경보대로 초조한 마음으로 군위를 빼앗고자 노심초사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대부 복의(卜齒+奇)와 모의하니, 복의가 힘센 장사를 구했는데 그 중에 추아(秋亞)라는 자로 하여금 노민공을 암살하게 하니 마침내 어린 노민공은 시해(弑害)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경보가 난을 일으키자 공자 계우(季友)와 공자 신(申)은 난을 피하여 주(邾)나라로 달아났습니다.
노나라는 대혼란에 빠져 경보와 복의를 원망하였고, 복의와 그의 가족들은 백성들에게 몰살당하고 맙니다. 이에 놀란 경보는 거(莒)나라로 달아났습니다. 이같은 변란을 접한 제환공은 이 참에 노나라를 정복할까 하다가 공손추가 노나라는 예의 있는 나라이고 주공(周公)을 숭배하는 나라이니 안 된다고 밝히자 노나라를 안정시킬 방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에 상경(上卿) 벼슬을 하고 있는 고해(高人+奚))에게 3,000의 군사를 주어 시국을 안정시키라고 노나라에 파견하게 됩니다. 때마침 주(邾)나라로 망명했던 공자 계우와 신이 돌아왔습니다. 고해는 공자 신(申)이 단정하고 말이 조리가 정연함을 알고 공자 계우와 논의하여 공자 신을 군위(君位)에 오르게 하니, 이가 바로 노희공(魯僖公)입니다.
이렇게 제환공은 끊어질 뻔 했던 노나라의 사직을 붙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환공은 천하의 패자로 명성을 날렸던 것입니다.
제환공은 또, 북방 오랑캐 적인(狄人)의 침공으로 전국토가 유린되고 백성의 대다수가 도륙(屠戮)된 소국 위(衛)나라와 형(邢)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각각 초구(楚邱)와 이의(夷儀)에 성(城)을 쌓아 유민들을 이주시키고 각종 물자와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양국(兩國)을 복국(復國)시킨 바가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제환공은 패자로서 천하를 안정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계절존망(繼絶存亡)이자 제약부경(濟弱扶傾)입니다.
그러나 이런 패자(覇者)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명재상 관중(管仲)은 죽음에 이르러 환공에게 간신 수조(竪刁)와 역아(易牙), 상지무(常之巫), 그리고 위공자(衛公子)인 개방(啓方)을 멀리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제환공은 이를 소홀히 들었는데, 과연 관중이 죽자, 이들은 정사를 어지럽히더니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환공은 방에 갇힌 채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7일이 지나도록 시체를 수습하지 못하여 방 밖으로 구더기가 기어나올 정도였다니 오패(五覇)의 으뜸이었던 제환공의 말로가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천자문을 통하여 우리는 제환공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대저 나라에는 바른 식견을 가진 어진 임금이 있어야 하고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는 어진 재상이 있어야 합니다. 임금에게 간사한 말로 비위를 맞추는 간신을 멀리 해야 하는 것은 고금이 다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