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字文 工夫

奄宅曲阜 微旦孰營

bindol 2020. 11. 13. 15:40

奄宅曲阜 微旦孰營

 

本文

奄宅曲阜 微旦孰營 엄택곡부 미단숙영

周公曲阜에서 큰 터 잡아 살았는데

周公 旦이 아니면 그 누가 경영하리.

 

訓音

가릴 엄 집 택 굽을 곡 언덕 부

작을 미 아침 단 누구 숙 경영 영

 

解說

지난 장에서는 반계이윤(磻溪伊尹) 좌시아형(佐時阿衡)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나라 말기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문왕(文王)을 돕고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주()나라를 건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태공망(太公望), ()나라 말기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을 구하려 일어난 탕왕(湯王)을 도와 은()나라를 건립하는데 공을 세운 이윤(伊尹) 재상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주()나라의 주공(周公) ()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엄택곡부(奄宅曲阜) 주공(周公)은 곡부(曲阜)에서 큰 터 잡아 살았는데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은 대() + ()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은 번개의 모양을 본뜬 모양입니다. ()는 사람의 모양입니다. 뇌운(雷雲)이 사람의 머리 위를 덮다의 뜻에서, '가리다, 갑자기'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엄복야(奄覆也)라 하여 '크게 덮다'가 본 뜻입니다. 또 장시간(長時間)을 덮어 가린다는 뜻에서, '오랫동안'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은 면()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부탁한다'는 뜻이고, ()''을 뜻하니, 편안히 몸을 담아 쉬는 '가옥(家屋)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본뜻이 '거주하다'의 뜻입니다.

()은 상형자(象形字)입니다. 나무나 대나무를 구부려 만든 그릇을 본떠 '굽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굽음'을 뜻하는데, 이는 마음이 굽는 것도 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래의 가락이 오르락내리락하므로 '곡조(曲調), 가곡(歌曲)'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는 상형자(象形字)입니다. 층이 진 흙산의 모양을 본떠 '언덕'의 뜻을 나타냅니다. 파생하여 '크다, 성하다, 많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가 부수로 쓰일 때는 '언덕부좌부방'이라 하고 ''자형으로 씁니다.

엄택곡부(奄宅曲阜)'곡부(曲阜)에서 크게 터 잡아 살았다.'는 뜻입니다. ()은 복야(覆也)라 했으니, '크게 덮다'의 뜻입니다. '크게 덮다'는 말은 '크게 터 잡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엄택(奄宅)이란 '크게 터 잡아 살다'의 뜻입니다. 혹은 엄()은 구야(久也)라 했으니, 엄택(奄宅)'오래도록 살았다'고 새기기도 합니다.

곡부(曲阜)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지명(地名)입니다. 이곳은 일찍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 분인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고도(古都)입니다. ()나라 말기 주왕(紂王)이 폭정(暴政)을 행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주무왕(周武王)이 강태공(姜太公)과 주공(周公)의 도움을 받아 주왕(紂王)을 토벌(討伐)한 후, ()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안정시킨 후, 공이 있는 공신들에게 제후국(諸侯國)을 봉()해 주었는데, 그 중 강태공은 제()나라의 제후(諸侯)로 봉하여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고, 주공(周公)은 노()나라의 제후에 봉해져 노나라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 노나라의 도읍이 곡부(曲阜)입니다. 당시 제후국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나라는 노()나라와 위()나라였습니다. 위나라의 시조는 주공(周公)의 아우인 강숙봉(康叔封)으로 조가(朝歌)에 도읍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은 이렇듯 제후국 중 가장 큰 노()나라를 분봉(分封) 받아 곡부(曲阜)를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경영했던 것입니다. 엄택곡부(奄宅曲阜)는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공상(周公像)

미단숙영(微旦孰營) 주공(周公) ()이 아니면 그 누가 경영하리.

()는 척()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는 미()의 원자(原字)로 복() +()의 변형입니다. ()은 선단(先端)의 뜻입니다. 여기에 척()을 붙여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가다의 뜻을 나타내었으나, 일반적으로 '희미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은밀하다'의 뜻으로도 쓰이고, '작다'로도 쓰입니다. , ()의 뜻으로도 변해, '없다'의 의미도 있고 비()의 뜻으로 '아니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은 지사자(指事字)입니다. ()에 지평선을 가리키는 일()을 더하여, 지평선[]위에 태양[]이 나타나며 밝아져 가는 '이른 아침'의 뜻을 나타냅니다.

()은 형() + () + ()의 회의자(會意字)입니다. ()'질냄비에 음식을 담아 사람을 대접함'의 뜻이고, ()'손에 잡다'의 뜻입니다. 여성이 질냄비에 손을 가져가 음식을 끓여 익히는 모양에서, '잘 익힘'의 뜻을 나타냅니다. 차용(借用)하여, '누구'라는 의문(疑問)의 조사(助辭)로서 쓰입니다. 뒤에 향() + ()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은 궁() + ()의 형성자(形聲字)입니다. ()은 밤의 진중(陣中)에 둘리어 밝히는 화톳불의 뜻이고, ()은 방이 많은 가옥의 뜻입니다. 주위에 화톳불을 둘리어 놓은 진영(陣營)의 뜻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파생하여 '경영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미단숙영(微旦孰營)이란 '주공(周公) ()이 아니면 그 누가 경영하겠는가?'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미()'작을 미'자이지만 여기서는 '아닐 미'자로 쓰였습니다. ()'아침 단'인데 여기서는 주공(周公)의 이름을 나타냅니다. 주공의 이름은 단()입니다. 따라서, 미단(微旦)'()이 아니면'이라는 뜻으로 새겨집니다. 숙영(孰營)'누가 경영하겠는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미단숙영(微旦孰營)은 주공 단()이 아니면 누가 경영하겠는가?

앞서 주공(周公)은 제후국 중 가장 규모가 큰 노()나라를 분봉(分封) 받아 도읍을 곡부(曲阜)로 정하여 나라를 경영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큰 터를 잡아 오래도록 경영할 이가 과연 누가 있어 그렇게 하겠는가? 이는 오직 주공 단(周公 旦)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며 주공을 추앙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주공은 어떤 인물인가 알아 보겠습니다.

주공(周公)은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문왕(文王)의 넷째 아들이자, 주나라를 건립한 무왕(武王)의 동생으로 성()은 희()이고, 이름은 단()입니다. 생몰연대는 미상입니다.

문왕의 정비인 태사(太姒)는 모두 1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장자는 백읍고(佰邑考)이며, 둘째 아들은 무왕(武王)인 발()입니다. 그 다음으로 관숙선(管叔鮮)이고 넷째가 주공단(周公旦)이며, 채숙도(蔡叔度), 조숙진탁(曹叔振鐸), 성숙무(成叔武), 곽숙처(霍叔處), 강숙봉(康叔封), 염계재(冉季載)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나라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주나라의 시조는 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은 희()인데, 제곡(帝嚳)의 넷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는 순()임금 때 후직(后稷)의 벼슬을 지냈으며, 지금의 섬서성 무공현(武功縣)인 태()땅에 봉함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9대째인 고공단보(古公亶父), 즉 태왕(太王) 때에 융적(戎狄)의 침략을 피해 부족을 데리고 지금의 섬서성 기산현(岐山縣)인 주원(周原) 땅으로 옮겨 갔는데, 이들 부락을 주()라고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상(. )나라의 말기인데, ()과 주()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고고단보(古公亶父)의 손자인 창(), 즉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 천하의 2/3는 이미 주()의 차지가 되어 있어서 창업의 기반을 확고히 다져놓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발(), 즉 무왕(武王)에 이르러 상(. )을 멸하고, 지금의 섬서성 서안(西安)인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한것이 기원전 1122년이며, 정식으로 국호(國號)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주나라가 중국의 천하를 다스린 것은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라고 하지만, 기원전 770년 주평왕(周平王) 원년에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후 모든 권력은 제후들의 손에 쥐어져 새로운 시대, 즉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형성되었습니다. 역사에서는 낙양으로 천도한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며,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합니다.

이상 간략히 주나라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주나라 역사 약 900년의 기틀을 세운 분이 주공(周公)입니다. 주공(周公)은 강태공(姜太公)과 더불어 무왕(武王)을 보필(輔弼)하여 폭정을 일삼은 주왕(紂王)을 토벌(討伐)한 후, ()나라를 건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평정하자 그 강역이 광대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천하를 다스리기 위하여 그 공이 높은 왕족(王族)과 공신(功臣)들을 제후(諸侯)로 봉해 다스리게 했으니, 이를 봉건제(封建制)라 합니다. ()이란 다스릴 영역의 경계를 정한 것이고, ()이란 그 영역에 나라를 건립하는 것입니다. 이런 봉건제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 바로 주공입니다. 당시 공신들에게는 공에 따라 5등급, 즉 공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자작(子爵)남작(男爵)의 작위를 주고 봉토(封土)를 하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분봉된 제후국이 수백이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주공(周公)은 노()나라, 강태공(姜太公)은 제()나라, 그리고 상()을 멸하고 나서 상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주왕(紂王)의 제사를 받들라고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를 은()에 봉했습니다. 무왕의 형 관숙선(官叔鮮)은 정주(鄭州)지역의 관()의 제후로, 무왕의 첫째 동생인 채숙도(蔡叔度)는 상채(上蔡)지역의 채()의 제후로, 셋째 동생인 곽숙처(藿叔處)는 곽주(藿州)의 곽()의 제후로 봉했던 것입니다.

무왕(武王)은 은()의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했지만, 관숙(官叔)채숙(蔡叔)곽숙(藿叔)으로 하여금 무경(武庚)과 유민들을 감시하게 했으니 이들을 삼감(三監)이라 합니다.

그런데 무왕(武王)은 주()를 건립하여 기틀을 채 다지기도 전에 삼년 만에 붕어(崩御)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이 즉위하니 이가 곧 성왕(成王)입니다. 그래서 숙부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게 됩니다. 주공은 성심성의를 다하여 섭정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주공의 섭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가 있는데 삼감(三監)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주공이 장차

 

어린 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무경(武庚)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겼습니다. 그러나 주공은 '삼감(三監)의 난()'3년만에 평정하였는데, 무경은 주살(誅殺)되었고. 관숙은 처형되었고, 채숙은 유배되었으며, 곽숙은 벼슬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무경에게 주었던 땅을 반으로 나누어 동생인 강숙봉(康叔封)에게 주어 위()라 하였고, 반은 주()의 형이요 성인이라 불리던 미자(微子)에게 주어 송()이라 하였습니다.

주공은 7년 동안 섭정을 했는데 성왕이 성인이 되자 깨끗이 섭정을 거두고 신하의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 성왕을 받들어 보필하였습니다. 훗날 공자(孔子)는 이런 주공을 성인(聖人)으로 추앙하였습니다. 그는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인물입니다. 그는 다재다능하여 봉건제(封建制)를 확립하였고, 예약(禮樂)을 제정했으며,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제정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했으며 그가 쓴 서편(書篇)들은 유교경전의 뿌리가 되었고 덕치국가(德治國家)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주공(周公)은 노()나라의 제후로 봉해졌고 곡부(曲阜)에 도읍하였습니다. 곡부는 주공으로부터 600년 후의 공자(孔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노나라는 제후국 중 그 강역이 제일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택곡부(奄宅曲阜)라 했습니다. 이런 큰 나라를 주공단(周公旦)이 아니면 어찌 경영하겠는가 하는 것이 미단숙영(微旦孰營)입니다.

끝으로 주공이 얼마나 인재를 중히 여겼는가 하는 대목을 옮겨 보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주공의 봉지(封地)는 노()나라인데 주공은 중앙에서 성왕(成王)을 보필하느라 아들 백금(伯禽)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백금을 보낼 때 주공은 이렇게 그를 타일렀습니다.

"나는 문왕(文王)의 아들이고, 무왕(武王)의 동생이며, 지금 임금[成王)]의 작은 아버지다.

나는 천하에서 역시 신분이 낮지 않을 것이다.(제후 중에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란 뜻임)

그런 내가,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해 한 번 머리를 감는 동안에도 세 번이나 머리카락을 쥐고 나왔고, 한 번 밥을 먹는 동안에도 세 번이나 입에 물었던 밥을 뱉어내고 일어나 선비를 대하고 있지만, 오히려 천하의 어진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네가 노나라로 가거든, 부디 조심해서 임금이라 하여 사람을 거만하게 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我文王之子 無王之弟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然我一沐三捉髮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子之魯 愼無以國驕人)"

이 일을 후대 사람들은 토포착발(吐哺捉髮) 혹은 토포악발(吐哺握髮)이라 일러 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주공은 목욕을 하거나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목욕을 중단하고 나왔고, 밥을 먹다가도 먹던 음식도 뱉어 버리고 손님을 맞이 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찾아오는 현인들의 좋은 충고를 받을 기회를 놓치거나, 그런 사람을 돌려보내거나 기다리게 하는 실례를 범할까 염려 했던 것이니 얼마나 인재를 예우하고 고견을 듣기를 좋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성(大聖) 공자(孔子께서는 이런 주공의 인품을 흠모하여 꿈에서라도 한번 만나 뵙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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