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庶幾中庸 勞謙謹勅
【本文】 庶幾中庸 勞謙謹勅 서기중용 노겸근칙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
공로(功勞)에 겸손(謙遜)하며 삼가고 경계(警戒)하라.
【訓音】
庶 무리 서 幾 거의 기 中 가운데 중 庸 떳떳할 용
勞 수고할 로 謙 겸손할 겸 謹 삼갈 근 勅 삼갈 칙
【解說】
지난 장에서는 맹자(孟子)가 본성(本性)을 돈독히 했음을 밝힌 맹가돈소(孟軻敦素)와 강직(剛直)한 성품의 소유자인 사어(史魚)가 바름을 견지하여 직간(直諫)을 했다는 사어병직(史魚秉直)에 대하여 공부했는데, 이번 장에서는 중용(中庸)의 길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서기중용(庶幾中庸)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부터 알아보고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서(庶)는 엄(广) + 의 회의자(會意字)로, '엄(广)'은 '지붕'을 뜻하고,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은 그릇 속의 것을 불로 찌거나 끓이는 형상이며, '자(煮)'의 원자(原字)라고도 하고, 옥내를 그슬러 해충을 제거하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가차(假借)하여, '여러'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또는 '엄(广)'은 '지붕'을 뜻하고, ''은 고문에 의하면 '광(光)'의 뜻으로, 지붕 밑에 등불이 많이 빛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붕 밑에 등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많이 모여든다는 생각에서 '여러, 많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기(幾)는 유(幺幺) + 수(戍)의 회의자(會意字)로, '유(幺幺)'는 자잘한 실의 상형(象形)이고, '수(戍)'는 '지키다'의 뜻입니다. 전쟁시에 수비병이 품는 미세한 마음씨의 상태로부터, '희미하다'의 뜻과 '위험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근(近)'과 통하여, '가깝다'의 뜻을 나타내며, '기(祈)'와 통하여, '바라다'의 뜻을 나타내며, 가차(假借)하여, '어느 정도'의 뜻도 나타냅니다.
중(中)은 구(口) + 곤(丨)의 지사자(指事字)로, 사방을 두른 담[口] 안에 물건을 넣는 모양[丨], 또는 어떤 물건의 한가운데를 뚫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안, 속'을 나타내며, 화살이 과녘 한가운데를 맞춘다는 뜻에서 '맞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용(庸)은 경(庚) + 용(用)의 형성자(形聲字)로, '경(庚)'은 양손에 절굿공이를 든 형상이고, '용(用)'은 종(鐘)의 상형으로, '사용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종이나 절굿공이 등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다, 집어 들다, 사용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전(轉)하여, '일정하게 변치 않다'의 뜻을 나타내며, 가차(假借)하여, 반어(反語)인 '어찌'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또, 경(庚) + 용(用)의 회의ㆍ형성자(會意 形聲字)로 보아, '경(庚)'은 '경(更)'과 같이 일을 고쳐 바꾼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새롭게 고쳐 바꾸어 소용에 이바지한다는 데서 '쓰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서기중용(庶幾中庸)은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으로 새겨집니다. 또는 '바라건대 현인(賢人)의 길 중용(中庸)의 길이어니'로도 새겨집니다. 여기에서 '서기(庶幾)'를 '바람, 바라건대'로 새겼습니다.
또, '서기(庶幾)'는 '가까움'을 뜻합니다. 그래서 서기중용(庶幾中庸)을 '중용에 가까워지려면'으로도 새깁니다.
'서기(庶幾)'는 또 현인(賢人)을 뜻합니다. 공자(孔子)께서 그의 제자 안회(顔回)를 일컬은 데서 유래합니다. 안회가 도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안회는 공자께서 가장 아낀 제자입니다.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안씨의 자식이(顔子) 그 도에 거의 가까운져!. 착하지 않음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함이 없으며, 착하지 않음을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하지 않았다.(顔氏之子, 其殆庶幾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也.)" 라고 한 데서 온 말입니다. 《繫辭傳下》
중용(中庸)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름을 말합니다. 즉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며 늘 변함없는 도리를 말합니다. 중용은 인간의 본성(本性)으로서 중(中)은 마음의 근본실체를 말하고, 용(庸)은 마음의 평상적인 작용을 말합니다.
중용(中庸)은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용(中庸)》은 본래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수록되어 있는 편명(篇名)인데 후에 독립된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공자께서 말씀하신 중용(中庸)의 진리를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이 전해지는 것을 잃을까 근심하여 지은 것이라 합니다.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제27장(第二十七章)」에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용의 덕은 지극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 덕을 소홀히 한 지가 오래되었구나."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중용(中庸)은 극단으로 치우치기 쉬운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이성(理性)으로서 치우치지 않도록 바로잡는 덕입니다. 그런데 이 지극한 덕을 사람들은 소홀히 하여 이를 행하는 이가 드물음을 공자께서는 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중(中)이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을 이름하고, 용(庸)은 마음의 평상적인 작용을 말합니다.(中者無過無不及之名也 庸平常也)
공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반(反)한다(君子中庸 小人反中庸).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맞게 하는 것이요(君子之中庸 君子而時中),
소인의 중용은 소인으로서 꺼리는 것이 없다.(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
하였습니다. 군자는 중용의 도리를 행하나 소인은 늘 소인짓을 하기에 중용과는 거리가 먼 반대로 행하면서도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중용의 도는 지극한 것인데도 이를 행하는 이는 지극히 드물기만 합니다. 이에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셨습니다.
"중용의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앎이 많은 자[知者]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愚者]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용의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알겠다.
어진 자[賢者]는 지나치고 못난 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에서 이르기를,
"희ㆍ노ㆍ애ㆍ락(喜怒哀樂)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中)이란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는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은 제대로 자란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인간의 정(情)을 흔히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라 하여 칠정(七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했습니다. 이 정(情)이 발하지 않은 것을 이러 성(性)이라 하는데, 이 성(性)이 편벽되거나 의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중(中)이라 합니다. 정(情)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정의 바름이라 하고, 어긋나지 않기에 화(和)라 하였습니다. 정(情)이 발하여 중(中)에 의해 잘 조절된 것이 화(和)입니다. 그래서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라 하고, 화(和)는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니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하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각기 제자리에서 제대로 자란다는 뜻입니다. 중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천지만물은 조화를 잃어 엉망이 되는 것이니 중화로 천지가 존재하고 중화로 만물이 화육(化育)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유교의 중용(中庸)은 마음의 감정이 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평상(平常) 그대로 항상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희노애락에 대하여 지나치게 치우치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이런 중용의 마음가짐은 악(惡)을 버리고 선(善)으로 가게 하고자 함입니다.
중용(中庸)과 중도(中道)의 차이
유교(儒敎)에 중용(中庸)이 있다면 불교(佛敎)에는 중도(中道)가 있습니다. 중용(中庸)과 중도(中道)는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 같은 것이 아니냐 하는 분도 있고, 사상적이 측면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중도(中道)란 시(是)와 비(非), 선(善)과 악(惡), 유(有)와 무(無), 생(生)과 멸(滅) 등의 양변(兩邊)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 중간도 아닌 절대 진리의 도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의 양 극단을 떠난 올바른 수행법도 중도라 합니다. 여기서 '중(中)'은 '정야(正也)'이니 '바르다'는 뜻입니다. 적절히 조화된 '가운데'가 아닙니다.
중도(中道)는 양변(兩邊)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融合)는 사상입니다. 선(善)과 악(惡), 유(有)와 무(無) 등 상대적인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는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가리킵니다.
중생은 늘 '있다 - 없다', '좋다- 나쁘다', '나다-너다' 등 상대적 양변에 집착하여 갈등과 투쟁을 야기하곤 합니다. 이 양변에 집착하면 번뇌만 낳을 뿐입니다. 세간의 법은 모두 상대법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법은 독립적으로 이루지지 않아 상대에 의지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같은 상대법은 생멸법(生滅法)인데 생멸법은 불교가 지향하는 법이 아니어서 구경(究竟)에 가서는 버려야 할 법입니다. 그래서 양변을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번뇌는 무명(無明)으로부터 생깁니다. 무명(無明)은 생사(生死)를 유전(流轉)하게 하는 동인(動因)입니다. 양변을 떠나라는 것은 이런 무명(無明)으로 벗어나게 하고자 함입니디. 무명을 벗어나 생사로부터 해탈시키고자 하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유교의 중용(中庸)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군자가 갖추어야 하는 덕으로 언제나 중정(中正)을 잃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는 덕목이라면, 불교의 중도(中道)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중도(中道)를 중생으로 하여금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깨닫게 하고자,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는 팔정도(八正道)를 행하여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실상(實相)을 보는 눈[眼]을 뜨게 하고, 지혜를 증득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번뇌를 여읜 적정(寂靜)의 세계, 열반(涅槃)으로 이끌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과 중도(中道)는 이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중도(中道)로 세상을 바라보면 일체 만법이 불교가 아닌 것이 없으니 중용(中庸)도 중도(中道)에 융합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만일 중용(中庸)도 이루지 못하면 어찌 중도(中道)를 행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상으로 중용(中庸)과 중도(中道)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천자문으로 돌아와서 중용(中庸)은 마음의 감정이 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평상(平常) 그대로 항상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을 이룸을 말합니다. 그런데 서기중용(庶幾中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뒤에 이어지는 노겸근칙(勞謙謹勅)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이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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庶幾中庸 勞謙謹勅
【本文】
庶幾中庸 勞謙謹勅 서기중용 노겸근칙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
공로(功勞)에 겸손(謙遜)하며 삼가고 경계(警戒)하라.
【解說】
지난 시간에는 서기중용(庶幾中庸)에 대하여 자세히 공부하였는데 이번 시간에는그 실천행이라 할 노겸근칙(勞謙謹勅)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노겸근칙(勞謙謹勅) 공로(功勞)에 겸손(謙遜)하며 삼가고 경계(警戒)하라
로(勞)는 력(力) + 형(熒)의 회의자(會意字)로, '형(熒)'은 홰를 엮어 세운 화톳불의 뜻입니다. 화톳불이 타듯이 힘을 연소시켜서, '피로해지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수고하다, 노곤하다, 괴로워하다'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수고한 것을 '위로하다'의 뜻도 나타냅니다.
겸(謙)은 언(言) + 겸(兼)의 형성자(形聲字)로, '겸(兼)'은 '렴(廉)'과 통하여, '단정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단정한 언동을 한다는 뜻에서 '삼가다, 겸손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근(謹)은 언(言) + 근(菫)의 형성자(形聲字)로, '근(菫)'은 찰흙을 바르다의 뜻입니다. 말이 바르다의 뜻에서, '삼가다, 조심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칙(勅)은 칙(敕)과 동자(同字)인데 속(束) + 복(攴)의 회의자(會意字) 혹은 형성자(形聲字)로, 본 뜻은 '경계하다'의 뜻으로 '신칙하다, 삼가다'의 뜻을 나타내며,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인 '조서'로도 쓰입니다.
노겸근칙(勞謙謹勅)은 공로(功勞)에 겸손(謙遜)하며 삼가고 경계(警戒)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노겸(勞謙)은 '큰 공로(功勞)가 있어도 겸손함'을 말합니다. 또는 '어려운 일을 맡아 애쓰면서도 겸손하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힘써 일하면서도 겸손함을 말합니다. 또한 '힘써 겸양(謙讓)하다'로도 새겨지고 '노고(勞苦)와 '겸양(謙讓)'을 아울러 이르기도 합니다. 근칙(謹勅)은 '삼가 스스로 경계하다'는 뜻으로 조심성이 많고 경솔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가짐을 삼가고 경계함을 말합니다.
노겸근칙(勞謙謹勅)은 앞서 설명한 서기중용(庶幾中庸)의 실천행이라 할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 노겸근칙(勞謙謹勅)을 명심하라는 뜻입니다.
앞서 노겸(勞謙)의 뜻을 살펴보았지만 공로가 있다고 해서 우쭐하여 자만(自慢)하거나 거만(倨慢)한 행동을 하면 이는 중용(中庸)을 잃은 행동이자 아상(我相)을 나타내는 것이라 자기 공로를 스스로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애써 일을 잘해 놓고도 욕을 먹게 됩니다. 공로가 있어도 겸손하면 마음의 평정을 이룬 것으로 누군들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역(周易)》의 64괘 중 15번째 나오는 곤상간하(坤上艮下)의 괘(卦)가 『지산겸(地山謙)』이란 괘(卦)인데, 겸손(謙遜)에 대해 나와 있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괘를 얻으면 "겸(謙)은 형(亨)하니 군자(君子)ㅣ 유종(有終)이니라." 하였습니다.겸(謙)은 형통(亨通)하니 군자(君子)가 마침이 있다는 말입이다.
이에 대해 정자(程子)는 말했습니다.
"겸(謙)은 형통(亨通)하는 도(道)가 있다.
덕이 있으면서도 거처하지 않는 것을 겸손(謙遜. 謙巽)이라고 하니,
사람이 겸손(謙巽)함으로 스스로 처신하면 어디 가선들 형통하지 않겠는가?
'군자가 마침이 있다[君子有終]' 함은 군자가 뜻을 겸손한 데 두어서,
이치에 통달했기 때문에 천명을 즐기면서 다투지 않고,
안이 충실하기 때문에 물러나고 양보하면서 자랑하지 않는다.
겸손함을 편안하게 이행해서 종신토록 바꾸지 않으니,
스스로 낮추어도 사람들이 더욱 높이고,
스스로 감추어도 덕이 찬란히 나타나므로,
이를 두고 '군자가 마침이 있다[君子有終]'고 말하는 것이다.
소인은 욕심이 있으면서 반드시 다투고 덕이 있으면 반드시 자랑해서,
비록 억지로 겸손하려해도, 또한 편안하게 행하지 못해서 굳게 지키지 못하니
마침이 있을 수 없다."
이렇듯 겸손은 중용의 길을 걷는 군자의 필수 덕목이라 할 것입니다.
노겸(勞謙)이란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높은 것을 좋아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겸손히 지내는 것도 드문 일인데 공로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으스대고 싶지 않겠습니까? 공로가 있어 높이 되었다면 그 권력을 휘두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낮추면 스스로 높아지는 법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소위 갑질을 하다가 원성과 빈축을 사는 사례는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힘을 가진 사람이 남을 억누르지 않기 어렵다." 하셨습니다.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범부(凡夫)의 행동이자 소인(小人)의 행동입니다. 중용을 실천하는 군자의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주역(周易)》『지산겸(地山謙)』「상사(象辭)」에 이르기를 노겸군자(勞謙君子)는 만민복야(萬民服也)라 했습니다.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한 군자는 만 백성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또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수고로워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이 있어도 덕으로 삼지 않음이 두터움의 지극한 것이니, 공로가 있으면서도 남의 아래함을 말함이다. 덕(德)은 성함을 말하고, 예(禮)는 공손함을 말함이니, 겸손이라는 것은 공손함을 이루어서 그 자리[位]를 보존하는 것이다.(勞而不伐 有功而不德 厚之至也 語以其功下人者也 德言盛 禮言恭 謙也者 致恭 以存其位者也)"
하였으니 겸손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겸손의 도리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하신 바가 많으셨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습니다.
"세상을 수호하는 사람[護世者]은 여덟 가지 도리를 가지고 세상을 수호한다.
첫째는 언행(言行)이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음이다.
둘째는 집안 어른을 존경해 가벼이 여기지 않음이다.
셋째는 말이 부드러워 거친 데가 없음이다.
넷째는 저를 낮추고 공손해서 늘 겸손(謙遜)의 뜻을 지님이다.
다섯째는 늘 질박(質朴)하여 아첨이 없음이다.
여섯째는 인화(仁和)를 닦아 비위를 맞추는 일이 없음이다.
일곱째는 온갖 악이 없음이다.
여덟째는 선근(善根)으로써 세상에 적응함이다."
이처럼 불자라면 받드시 겸손이란 덕을 지녀야 할 일입니다.
또, 부처님께서《수호국계주경(守護國界主經)》에서 이르셨습니다.
"보살은 자신을 낮추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되 겸양(謙讓)하여 스승을 따르며, 또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謙遜)을 터득게 한다."
이와 같이 어떤 일에 힘써서 공로가 있다거나 은혜를 베풀었더라도 그 상(相)을 나타내지 않고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중용을 바라고 중용에 가까우려면 반드시 겸양의 덕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 도리입니다.
또 중용을 가까이 하고 중용을 바라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사항은 근칙(謹勅)입니다. 근(謹)은 '삼가', '삼가다'는 뜻이고, 칙(勅)은 '타이르고 경계하다'는 뜻이니, 근칙(謹勅)은 '삼가고 경계하다', 삼가 스스로 경계하다', '조심성이 많다', '경솔하지 않다' 등의 뜻을 나타냅니다. 근칙(謹勅)은 계신(戒愼)의 뜻과 같습니다. '삼가 경계하라'는 말은 오직 바름을 견지하고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이 근칙(謹勅)이나 계신(戒愼)은 누가 보거나 보지 않거나 언제 어디서든지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성현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
하였습니다. 신독(愼獨)이란 말은 수신(修身)의 도입니다. 이는 남 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이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철(性徹) 스님께서 즐겨 쓰시는 말씀 중에 '불기자심(不欺自心)'이 생각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남 앞에서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보지 않는 곳에서는 행동이 방일하다면 이는 남을 속이는 일이자 자기기만입니다.
《법구경(法句經)》『비구품(比丘品)』에서 부처님께서 노래하셨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고서
안으로 마음과 싸워야 한다.
자신을 보호하고 진리 염(念)하면
비구는 언제나 안락하리라.
(當自勅身 內與心爭 護身念諦 比丘惟安)
이 말씀은 마땅히 스스로 악업(惡業)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단속하고 경계하여 안으로는 삿된 생각과 싸워서 악에 물들지 않도록 굳건한 보리심(菩提心)을 키워서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진리를 염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마침내 열반(涅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을 길을 바란다면 공로(功勞)에 겸손하며 몸과 마음의 가짐을 삼가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화(中和)를 이루어 도덕군자(道德君子)가 되고,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행하여 해탈열반(解脫涅槃)을 구하는 이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은 겸손(謙遜)과 근칙(謹勅)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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