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처가에서

bindol 2021. 3. 11. 18:43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처가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처가에서

처가에서 겨울과 여름을 나는데
본가에서는 연락 한 편 오지 않누나.
빈둥거림 길들이자 묘한 맛이 생겨
도를 깨우친다는 헛된 명예가 참 우습다.
지저귀는 새들하고 수작이나 하고
산풍경이나 노상 접하고 있네.
세상사람 어느 누가 이런 복을 누리랴?
부잣집 호의호식도 나만은 못하리라.

 

甥舘

甥舘淹寒暑(생관엄한서)
家書阻雁魚(가서조안어)
習閒生妙味(습한생묘미)
覺道笑虛譽(각도소허예)
鳥語供酬酌(조어공수작)
山光接起居(산광접기거)
世人誰享此(세인수향차)
鐘鼎不如余(종정불여여)

숙종조의 시인 원옹(園翁) 이의승(李宜繩·1665~1698)이 처가에서 한동안 머물 때 지었다. 처가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이 어정쩡한 생활을 이어간다. 1년이나 길게 떠나 있어도 본가에서는 연락 한번 오지 않는다. 아마도 껄끄러운가 보다. 하루하루 빈둥거리기만 하다 보니 공부하고 부산 떨며 일하는 게 다 귀찮다. 무료하고 나른한 생활도 묘한 재미가 있구나. 딱히 할 일도 없는 사위란 존재는 그림자와도 같아 간섭하거나 눈치 주는 이들이 없다. 그저 새들하고 친구 삼아 지내고 산만 질리도록 바라본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지금 이 순간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 옛날에 백년손님이 한동안 누렸던 행복이란 저런 묘미가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