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bindol 2021. 3. 15. 04:43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題聖居山元通庵窓壁(제성거산원통암창벽)

동쪽에서 눈부시게 해가 떠오르고
신령한 비인가 나뭇잎이 떨어진다.
창문 열자 온갖 걱정 말끔해지고
병든 몸에선 날개가 돋으려 한다.

 

 

東日出杲杲(동일출고고)
木落神靈雨(목락신령우)
開窓萬慮淸(개창만려청)
病骨欲生羽(병골욕생우)

 

세조가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서른두 살에 개성 성거산에 올라 원통암이란 절에서 하룻밤 묵었다. 아침에 일어나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니 온 천지에 낙엽이 떨어진다. 늦가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우수수 지는 낙엽! 그의 눈에는 산신령이 흩뿌리는 비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눈에 들어오는 해맑은 산, 신령한 비가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간 게다. 가슴에 쌓인 걱정도 사라지고 병든 몸 겨드랑이에도 날개가 돋아날 것만 같다.

낙엽은 시들어가고 사라지는 것의 표상이다. 그런 낙엽을 보며 생명의 약동을 느끼는 자 있던가? 그러나 남효온에게 낙엽은 우울한 낙하(落下)가 아니라 생명을 잉태한 신령스러운 비다. 낡고 묵은 것이 스스로 떨어져 온 세상을 비움으로써 새 생명이 활개칠 세상을 펼쳐놓는다. 병든 몸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신령의 비다. 그처럼 한번 생각을 바꿔봐야겠다. 목락신령우(木落神靈雨)! 신령의 비가 되어 지금 천지에 잎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