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생각이 있어

bindol 2021. 3. 15. 04:48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생각이 있어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생각이 있어 有所思(유소사)

 

허둥지둥 달려온 마흔여섯 세월
거친 꿈은 아직 식지 않았는데
가을빛은 천리 멀리 밀려오고
석양은 하늘에서 내리 비치네.
강호의 곳곳에는 아우들이 있고
비바람 속 벗들은 곁을 떠나네.
남산의 달빛 아래 홀로 섰나니
고목 가지엔 거미가 줄을 치누나.

 

 

悤悤四十六(총총사십육)
磊落未全消(뇌락미전소)
秋色生千里(추색생천리)
夕陽照九霄(석양조구소)
江湖弟子在(강호제자재)
風雨友生遙(풍우우생요)
獨夜終南月(독야종남월)
蛛絲古木條(주사고목조)

―황오(黃五·1816~?)

 

 

19세기 조선의 기이한 시인인 녹차거사(綠此居士) 황오(黃五)의 작품이다. 사십도 중반을 넘긴 중년 남자의 뒤숭숭한 마음자리가 쓸쓸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중년도 막바지다. 젊은 날의 호쾌한 꿈을 접을 때는 아직 아니다. 천지를 단풍으로 물들이며 밀려오는 가을빛과 석양을 붉게 물들인 노을은 이번 생(生)의 마지막 기회인 양 찬란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벌써 동생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내 또래들은 세파에 밀려 하나둘씩 주변에서 사라진다. 나라고 별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달빛 아래 홀로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고목(古木)의 나뭇가지 사이로 거미란 놈이 열심히 거미줄을 친다. 헛된 꿈에서 깨어 시들어가는 몸과 나이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하는 걸까? 중년 남자의 허전한 심사는 그렇게 어둠에 묻혀간다.